
지난 16일 일본 도쿄에서 만난 박용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일본지역본부장(도쿄무역관장)은 "최근 일본 내에도 미·중 패권 경쟁과 자국 첨단 산업 육성을 위해 한국을 경제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30년 전 일본에서 처음 근무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한국의 기술력, 기업 자생력에 의문을 표하던 보수적인 일본 사회가 오히려 한국 기업과 수출 협력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는 변화에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소회를 전했다.
박 관장은 1995년 코트라에 입사한 후 일본, 캐나다, 중국, 미국 실리콘밸리 등에서 근무하며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을 도왔다. 일본 내 4개의 무역관을 총괄하는 일본지역본부는 한국 기업들의 일본 진출 전략을 수립하고 총괄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과거 한국과 일본이 경쟁 구도였다면 지금은 한국은 제조, 일본은 소재·부품·장비 등으로 분업화됐다"면서 "글로벌 공급망 전체로 보면 양국은 상호 보완적 관계"라고 했다. 그러면서 "첨단 산업이 경쟁력을 갖추려면 원천기술과 제조력, 부품·설계 역량이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하는 만큼 한·일은 서로 최적의 위치"라고 짚었다.
일본은 한국 스타트업들이 사업을 실증화할 최적의 '테스트 베드'라고 박 관장은 설명했다. 일본 내수시장은 한국보다 약 2.5배 더 크고, 지리적 인접성, 유사한 정치제도와 문화 등이 강점이다. 그는 "미국 실리콘밸리가 성공에 대한 기술을 배우는 곳이라면 일본은 사업 아이디어를 실제 매출로 연결할 수 있는 검증된 시장"이라면서 "스타트업이 다양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수익을 창출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과 비슷한 사회문제를 갖고 있으면서 내수는 큰 일본이 사업을 실증화할 가장 적합한 무대"라고 말했다.
유망한 업종으로는 인공지능(AI), 디지털전환(DX) 인프라, 의료, 반려동물 등을 지목했다. 일본 사회가 겪고 있는 저출산, 고령화, 노동인구 감소, 의료수요 증가 등 각종 사회문제를 한국의 유망 AI 스타트업들이 디지털 경험과 접목해 해결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2022년 7월 일본 오키나와에 법인을 설립하고 무인 렌트카 솔루션을 선보인 캐플릭스가 대표적이다. 캐플릭스는 얼굴인식 기능을 갖춘 무인 키오스크 단말기를 통해 차량 예약부터 인도까지 전 과정을 자동화해 일본 렌터카 업계의 만성 인력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박 관장은 "일본에 2018년 디지털청이 생긴 이후로 각 지자체에서 무인화, 저출산, 고령화, 노동인구 감소 등을 해결하는 DX사업에 대한 예산을 많이 배정했다"면서 "코트라는 일본의 정책 니즈를 파악해 한국의 스타트업을 매칭하고, 수출에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일이 협력하면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수소산업 등 거의 모든 첨단 산업에서 벨류체인이 완성돼 미중 패권 구도 강화, 관세전쟁 등에서 빚어지는 공급망 리스크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면서 "기업 체급별로 한일이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협력 과제를 발굴해 네트워킹 행사나 공동구매조달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수출 기업들에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당부했다. 박 관장은 "흔히 수출기업들은 '일본은 제품만 좋으면 성공한다'고 생각하는데 의외로 품질과 가격 경쟁력이 높아도 빛을 보지 못하는 기업들이 많다"면서 "일본에서는 현지 통관 절차, 유통망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행정절차가 오래 걸리고 까다롭기 때문에 시간에 대한 여유, 과감한 현지 채용과 투자 없이 소극적인 마인드로 접근하면 뚫기 쉽지 않다"고 조언헸다.
박 관장은 "한일 모두 새로운 협력의 틀을 원하는 지금이 파트너십을 강화할 적기"라고 강조했다. 코트라는 수출기업을 위한 새로운 협력모델을 발굴해 업계 전반에 전파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는 "과거에는 수출상담회, 무역박람회 중심의 비즈니스 협력 모델을 개발했지만 지금은 한일 경제안보공급망 구축이라는 큰 틀 안에서 R&D(연구개발)협력, 제3국 공동진출, 조인트벤처 설립 등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개발하고 있다"며 "한류가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일본 일상 속으로 정착한 만큼 양국의 경제안보 파트너십도 생활 속에 뿌리내리게 해 새로운 한일 협력의 전기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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