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이 암호화 자산 시장의 제도화를 추진하는 가운데서도 정부의 인가를 받지 않은 가상 거래소들이 활발히 활동하며 투자자 피해가 확산되고 있다. 공식 거래소가 한 곳도 없는 상황에서 이른바 '지하 암호화폐 시장'이 베트남 온라인 공간을 장악하고 있다.
베트남 청년신문에 따르면 지난 5일 열린 정부 정례 기자회견에서 응우옌득찌 재무부 부부장(차관 격)은 "현재까지 어떤 기업도 암호화 자산 거래소 시범 운영을 위한 공식 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정부는 암호화폐 시장 제도화를 위해 최대 5곳의 거래소를 허가할 계획이지만 현실에서는 이미 수많은 가상 거래소가 투자자들을 끌어들이며 시장의 혼란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지난 8월 푸토성 경찰이 TCIS.ai라는 웹사이트와 TCIS 토큰을 이용해 다단계 방식으로 자금을 모집한 대규모 사기 조직을 적발한 사건이다. 이들은 외국인을 고용해 성공한 기업인으로 가장하고 전국 각지에서 세미나를 개최해 약 4000명으로부터 500억 동(약 27억원)을 모았다. 이후 자금을 가로챈 뒤 폐쇄됐으며 피해자 상당수는 자산을 돌려받지 못했다.
응우옌 흐우 후언 호찌민경제대 교수는 "정부의 디지털 자산 시범 운영 추진 움직임을 악용해 가짜 기업들이 세미나를 열고 투자금을 모으고 있다"며 "공식 정보가 부재한 상황에서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있고 선점을 노린 투자자들이 큰 손실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며 명확한 제도 정비가 이루어질 때까지 투자를 자제할 것을 권고했다.
◆ 암호화폐 사기 급증… 정부 단속 예고
미국 연방수사국(FBI) 사이버범죄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암호화폐 관련 사기 피해액은 93억 달러로 전년 대비 약 70% 증가했다. 베트남은 이 가운데 사기성 자금 흐름이 가장 많은 6개국 중 하나로 꼽혔으며 이는 시장 감시 체계 부재가 초래하는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와중에 지난 8일 다낭시에서 열린 '암호화 자산 정책 대화 포럼'에서 또 쩐 호아 국가증권위원회 부위원장은 "공식 인증을 받은 VASP(가상 자산 서비스 제공자)가 운영을 시작한 뒤 6개월 이내에 이를 통하지 않고 거래하는 투자자는 처벌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정부가 향후 무허가 거래소 단속에 적극 나설 방침임을 시사한다.
베트남 암호화폐 시장은 이미 거대한 규모로 성장했다. 암호화폐 결제업체 Triple-A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베트남 인구의 20% 이상이 암호화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블록체인 및 암호화폐 분석업체 체이널리시스(Chainalysis)는 베트남을 전 세계 암호화폐 수용도가 가장 높은 3개국 중 하나로 꼽았다.
후언 교수는 대부분의 베트남 암호화폐 보유자들이 해외 플랫폼을 통해 익명으로 거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향후 베트남 내 공식 거래소가 출범하더라도 이들이 자산을 국내로 옮길지는 불투명하다"고 분석했다. 현재 규정상 외국인은 베트남 거래소에서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지만 베트남인은 암호화 자산을 '판매'할 수 있을 뿐 '구매'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베트남인이 해외 거래소를 이용할 경우 위법이 되며 당국이 이들의 활동을 추적하기 어려운 구조다.
◆ 제도화는 기회이자 과제… 전문가들 "투명한 규정 필요"
이에 전문가들은 베트남 정부가 암호화폐 거래소를 도입하는 데 있어 투명한 규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당 민 뚜언 베트남 블록체인 연합 회장은 "정부의 시범 운영은 정식 법적 틀을 마련해 무허가 거래소를 줄이고 사기를 예방하는 데 효과적일 것"이라며 "거래소 설립 요건으로 제시된 1조 동의 자본금은 투자자 보호를 위한 안전장치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다만 현행 규제 아래에서는 베트남 투자자가 국내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가 제한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인도 자유롭게 암호화 자산 시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정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베트남 가상자산 투자 플랫폼인 SSI 디지털의 레 바오 응우옌 부사장은 베트남 정부의 암호화폐 거래소 도입을 "중대한 진전"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시장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투자자가 위험을 인식하도록 명확한 정보공개와 상품 분류 기준 마련 △시장 감시를 강화해 조작과 사기 행위의 조기 탐지 △국제 수준의 사이버 보안 및 자산 보관 기준을 도입해 신뢰 확보 △투자자의 충분한 이해를 위한 금융 교육 확대 등이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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