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 논설위원장]
요즘 세계 금융시장을 살펴보면 이상한 광경이 반복된다. 엔비디아의 주가가 뛰면 뉴욕증시뿐 아니라 도쿄와 서울, 런던과 프랑크푸르트까지 일제히 들썩이고, 반대로 엔비디아 실적이 기대에 못 미치면 글로벌 증시는 동시다발적으로 흔들린다. 마치 세계 경제의 체온을 재는 온도계가 GDP(국내총생산)나 금리가 아니라 단 한 기업의 주가가 된 듯한 묘한 느낌마저 준다. 비트코인도 다르지 않다. 규제나 ETF(상장지수펀드) 관련 뉴스 한 줄이면 전 세계 자금이 순식간에 출렁이고, 위험자산과 안전자산의 축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뀐다.
이런 현상은 일부 투자자들의 과장된 반응이나 일시적 유행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엔비디아 하나에, 비트코인 하나에 세계 시장이 급등락하는 이 장면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본주의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예고한다. 과거처럼 산업별·국가별·기업별로 리스크가 분산된 자본주의가 아니라, 특정 기업과 특정 자산에 경제적 중력이 몰려드는 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그리고 이 현상은 비정상일까, 아니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정상일까.
오늘의 시장에서 엔비디아가 차지하는 위치는 단순한 반도체 회사의 범주를 넘어선다. 엔비디아는 GPU(그래픽 처리장치) 라는 새로운 엔진을 통해 AI 시대의 속도를 결정하는 기업이 되었고, 기술 생태계의 중심에서 사실상 새로운 기술 표준을 만들고 있다. 데이터센터, 자율주행, 로봇, 국방, 사이버 보안까지 AI가 들어가는 거의 모든 산업의 중요한 연결점에 엔비디아의 기술이 걸려 있다. 이런 구조에서는 한 기업의 실적과 방향성이 단순한 ‘기업 뉴스’에 그치지 않고 글로벌 기술·산업의 방향성을 상징하는 지표가 된다.
비트코인 역시 마찬가지다. 비트코인은 전통적 금융 논리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변동성을 지니고 있지만, 금융시장에서 차지하는 상징적 위치는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24시간 거래가 가능하고, 국경을 뛰어넘어 자본이 이동하며, 글로벌 규제·정책 변화에 가장 빠르게 반응한다는 점에서 비트코인은 세계 금융시장의 ‘실시간 체온계’ 역할을 하고 있다. 금리 인상기에도, 지정학 위기 상황에서도, 비트코인은 자금이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속도가 가장 빠른 지표였다. 시장의 심리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고 싶을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자산이 이제는 비트코인이 된 것이다.
비트코인이 안전자산인지 위험자산인지 묻는 질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비트코인이 글로벌 자산 배분의 리듬을 결정하는 ‘감정의 바로미터’가 되었다는 점이다. 월가의 알고리즘 트레이딩 시스템은 이미 비트코인을 주요 매크로 지표로 사용하고 있고, 각국의 금융당국조차 비트코인의 변동이 파생시장·원자재시장·신흥국 외환시장에 어떤 영향을 줄지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이처럼 세계 경제의 중력이 특정 기업과 특정 자산에 쏠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원인은 기술경제의 구조 변화다. AI·반도체·플랫폼 경제는 승자독식이 아니라 ‘승자전부독식’ 구조로 움직인다. GPU 생태계는 초기 승자가 이후 시장 전체의 성장 과실을 독점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텍스트나 사진을 처리하던 과거의 소프트웨어 플랫폼과 달리, AI와 GPU는 수십조원의 데이터센터·전력·반도체 투자를 필요로 한다. 돈이 돈을 부르는 구조에서 앞선 기업은 더 빠르게 앞서가고, 뒤처진 기업은 완전히 밀려나기 쉽다. AI 시대의 경쟁은 ‘초기 역량’이 미래 전체를 결정하는 경주에 가깝다.
둘째 원인은 패시브 ETF의 급격한 확산이다. 시가총액 비중을 기준으로 자동 매입하는 구조는 이미 잘나가는 기업에 더 많은 자금을 몰아넣는 가속기 역할을 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주가가 오르면 시총이 커지고, 시총이 커지면 ETF는 엔비디아를 더 사야 하고, 이 과정이 다시 주가를 올린다. 시장의 자율적 조정 기능이 약해지고, 특정 종목의 상승이 전체 시장을 끌어올리는 ‘구조적 쏠림’이 고착화된다.
셋째 원인은 스토리 중심의 금융, 즉 ‘내러티브 시장’의 확장이다. AI, 로봇, 자율주행, 디지털 화폐 같은 거대한 기술 스토리는 투자자들에게 미래를 상징하는 단일 자산을 찾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시장은 몇 개의 슈퍼스타 자산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엔비디아는 AI 스토리의 대표, 비트코인은 새로운 화폐 스토리의 대표가 되었다. 미래를 상징하는 자산이 만들어지면 그 자산은 단순한 금융상품이 아니라 시대의 상징이 된다.
넷째 원인은 플랫폼 잠김 효과, 즉 네트워크 외부성이다. CUDA(엔비디아가 GPU를 프로그래밍하기 위해 개발한 플랫폼) 생태계처럼 한 기업의 기술이 산업 전체의 표준으로 자리 잡으면, 후발주자는 그 생태계에 편입될 수밖에 없다. 엔비디아는 GPU 기술 기업이 아니라 사실상 글로벌 AI 플랫폼 기업이 되었고, 그 결과 전 세계 AI 투자의 흐름이 엔비디아라는 한 점에 집중되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 현상이 비정상적인가? 엄밀히 말하면, 전통적 시장 이론 기준에서는 ‘정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세계 경제가 단일 기업과 단일 자산의 변동에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시스템 리스크를 키우는 불안 요소이며, 분산 투자와 균형 성장이라는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에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한 버블이 아니라 기술·자본·정책이 맞물려 형성한 구조적 변화의 결과이다. 과거의 정상은 이미 사라졌고, 우리는 새로운 정상(뉴 노멀) 속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 각국은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미국은 엔비디아 중심의 AI·GPU 생태계를 사실상 국가안보 자산으로 규정하고 있다.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규제 움직임은 있지만, 동시에 AI 산업의 전략적 우위를 미국이 유지하기 위해 엔비디아에 상당한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일본은 엔비디아와 같은 슈퍼스타 자산을 성장의 시발점으로 삼아 NISA(소액투자비과세 제도) 확대, 디지털 인프라 투자, 클러스터 육성 정책 등을 총동원해 자본시장 재활성화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은 GPU 조달 경쟁에 뛰어들며 추격을 선택했지만, 시장 쏠림 리스크에 대한 거버넌스는 아직 초기 단계다.
이 구조 변화는 중간 규모 국가일수록 더 복잡한 질문을 던진다. 몇 개의 글로벌 기업이 기술·자본·인재의 흐름을 독점하게 되면, 대부분의 국가는 기술 종속의 가능성을 피하기 어렵다. AI 시대의 플랫폼 경쟁에서 패하면 국가 경쟁력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한국이 AI 반도체, 데이터센터 정책, GPU 조달 전략, AI 제조혁신 클러스터 등에서 속도를 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우리가 목격하는 이 특이한 시장 동학은 비정상의 연속이 아니라 새로운 경제 질서의 초입에 불과하다. 기술이 산업을 넘어 경제 전체의 구조를 재편하고, 금융시장은 스토리와 알고리즘 중심으로 움직이며, 자본은 그 스토리를 대표하는 몇 개의 ‘중력원(重力源)’으로 빠르게 수렴하고 있다. 그 중심에 엔비디아와 비트코인이 있다.
과거의 자본주의가 넓게 퍼져 있는 모델이었다면, 오늘의 자본주의는 깊게 집중되는 모델이다. 넓어지는 대신 깊어지고, 분산되는 대신 특정 지점에 중력을 모으는 형태로 변하고 있다. 이것이 시장을 취약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산업과 국가 전략을 설계하게 만드는 현실이다.
앞으로 세계는 이런 집중의 경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리고 한국은 이 변화의 시대를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이 질문은 단지 금융시장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기술, 산업, 국가 전략의 핵심에 관한 질문이다. 슈퍼스타 자산이 흔드는 세계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한국 경제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챗GPT가 등장한 지난 3년은 AI가 인간의 일상과 산업 전반을 재편하는 속도의 시대였다. 그러나 앞으로의 5년은 그보다 훨씬 더 큰 변화가 몰려올 시기다. AI 모델의 고도화, 데이터센터 경쟁, GPU·전력 인프라 문제, 제조업의 대전환까지 모든 산업과 국가 전략이 다시 설계돼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국가의 ‘설계력’이다. 더 큰 파도가 다가오는 만큼, 한국은 AI·제조·자본을 통합하는 방대한 국가전략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박스)
김정호 KAIST 교수가 제시한 ‘한국의 5대 전략’
(전기 및 전자공학부)
1. AI 인프라의 국가전략화; GPU 조달을 넘어 AI 개발–데이터센터–산업 적용을 연결하는 국가 AI 인프라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2. 제조업의 AI 클러스터 대전환; 포항·광양·울산 등 기존 제조 거점을 AI 기반 제조혁신 클러스터로 재편해 경쟁력을 재건해야 한다.
3. 기술 중심 자본시장 업그레이드; K-ETF 경쟁력 강화, 기술가치평가 혁신, 연기금의 전략산업 투자 확대를 통해 자본시장을 기술 혁신의 동력으로 전환해야 한다.
4. 미·일·중 ‘능동적 다중연결 전략’; 미국(AI·GPU)–일본(제조·인프라)–중국(시장·플랫폼)과의 분야별 선택적 협력 체계를 설계해 위험을 분산해야 한다.
5. 국가전략의 ‘설계자’로 전환; 한국은 더 이상 추격자일 수 없다.
AI–제조–자본을 통합 설계하는 국가 아키텍처 전략이 필요하다. 슈퍼스타 자산 시대에 결정적인 것은 속도가 아니라 설계력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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