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연구원장 재직 시절 독일을 방문하여 전독문제연구소장을 역임한 데틀레프 퀸(Detlef Kuehn)을 만난 적이 있다. 우리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과 유사한 전독문제연구소장으로부터 독일 통일의 경험을 들어보려는 면담이었다. 퀸 소장으로부터 두 가지 인상적인 말을 들었다. 하나는 퀸 소장이 전독문제연구소 설립 당시부터 독일 통일 때까지 소장을 맡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독문제연구소 구성원 중에 동독과 연계된 첩자가 있었지만 문제 삼지 않고 지켜봤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궁금했다. 우리의 경우 1991년에 설립한 통일연구원의 원장이 지금까지 19명이었고 지금은 공석이다. 남북관계는 완전히 단절되고, 남북주민들의 소통도 완전히 차단됐다.
어떻게 한 사람이 여러 정권에 걸쳐 전독문제연구소장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을까. 비결은 다당제를 운영하는 서독 정치체제에서 찾을 수 있다. 서독은 비례대표제와 혼합선거제를 바탕으로 6~7개 주요 정당이 의회를 구성하는 다당제를 운영했기에, 연립정부가 일상적이었다. 서독의 연립정권들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통일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소수정당 출신인 퀸 소장을 교체하지 않았다. 서독의 한스디트리히 겐셔(Hans-Dietrich Genscher)는 1974년부터 1992년까지 18년간 외무장관으로 재직했다. 서독의 여러 정파들이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과 제휴하여 일관성 있는 동방정책과 데탕트를 추진하기 위해서 겐셔 장관을 장기 유임시키는 전략적 선택을 했던 것이다. 소선거구제와 양당체제를 운영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여야 간 극한 대립으로 대북정책과 외교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퀸 소장이 동독과 결탁한 연구원을 단속하지 않고 지켜 본 것은 그가 전달한 정보가 기밀에 속하지 않고 이미 공개된 내용이라 동독으로 유입되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서독 정보가 동독으로 들어가면 서독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독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자신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체제 역량이 우세한 쪽의 정보가 열세한 쪽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도 북한 정보의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북한 관련 인터넷 사이트를 유해물로 지정하여 차단하고 있다. 북한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최소한의 북한 관련 사이트는 개방해야 한다. 북한은 ‘반동사상문화배격법(2020)’ 등을 제정하고 남측으로부터 올라오는 정보를 전면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북한이 단둥-신의주를 연결하는 신압록강대교를 10년 전에 완공하고도 아직 개통하지 않고 있는 것은 중국으로부터의 정보 유입을 경계하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론’을 내놓은 이래, 우리 사회에서는 두 국가 정책과 관련한 논쟁을 지속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적대적’이든, ‘평화적’이든 두 국가 정책은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는 헌법 3조에 반하는 것이고, 두 국가 정책은 영구분단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통일지향의 평화적 두 국가관계’ 틀을 제시하고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중간단계인 남북연합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국가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통일부는 ‘통일지향의 평화적 두 국가관계’ 해법을 제시하고 교착된 남북관계를 풀려고 한다.
남북관계사를 돌이켜 보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후 남과 북은 서로의 ‘국가성’을 인정하는 두 국가 해법을 모색해 왔다. 통일의 중간단계로 ‘남북연합’ 설정,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실현, 남과 북의 통일방안 공통성 인정 등은 두 국가 해법에서 나온 정책과 합의다. 두 국가 해법은 국내적으로는 진보와 보수 정부 모두 시도한 정책이다. 남북 사이의 많은 합의들도 두 국가 해법에 근거한 것이고, 유엔동시가입으로 두 국가 해법은 국제적으로도 공인받았다. 따라서 통일을 향한 두 국가 해법을 과정으로 보지 않고, 영구분단으로 보는 것은 역대 정부의 통일 노력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 내에서 대북정책 주도권을 둘러싸고 이른바 ‘자주파’와 ‘동맹파’ 사이의 갈등이 표출되었다. 업무보고 과정에서 대통령이 대북정책과 관련한 통일부 주도권을 인정했지만,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은 잠재돼 있다. 아마도 대통령의 생각은 국가안보와 관련한 외교·통상, 국방·안보 등과 관련한 주요정책결정은 안보실장이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는 NSC에서 주도하고, 대북정책은 통일부 장관이 관계 장관회의나 차관회의를 통해서 조율해 나갈 것을 희망하는 것 같다. 북한이 두 국가 정책을 헌법적·물리적으로 구체화하고 ‘잠정적 특수관계론’을 부정하는 상황에서 대북정책을 자주와 동맹의 문제로 치환하여 이원적 접근을 시도하면 현실정합성이 떨어진다. 지금은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 정책을 본격화하고 있어 남북관계 자체 동력으로 관계를 정상화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미정상회담의 결과물인 ‘조인트 팩트시트’에서도 대북정책과 관련한 한·미협의를 적시하고 있는 것처럼, ‘선미후남’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한·미의 대북정책 조율은 불가피하다.
진보진영은 문재인 정부 시기 미국이 한·미워킹그룹을 통해서 대북제재 해제를 반대하고, 남북합의 사항이었던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를 반대한 데 따른 남북관계 단절에 많은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한·미워킹그룹에서 우리의 주도성을 발휘하지 못한 전례 때문에 외교부가 불신당하지만, 지금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정책에 편승하여 전향적인 ‘한반도 평화구상’을 제시하고 북·미관계 정상화를 추진할지 모르는 결정적 시기다. 우리의 운명과 직결된 한반도 문제에 우리가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는 한·미협의를 지속해야 한다. ‘하노이 노딜’이 남북관계 단절의 변곡점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내년 4월 미·중정상회담 전후에 열릴 가능성이 높은 북·미정상회담에 대비하여 미·중·러 등 관련 국가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전 통일연구원장 ▷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전 청와대 안보실 정책자문위원장 ▷현 국회 한반도 평화외교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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