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순 칼럼] 美 국가안보 전략서가 던지는 질문  

이백순  법무법인 율촌 고문
[이백순 법무법인 율촌 고문]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서(NSS)’가 예상보다 늦게 12월초 공표되었다. 발간된다는 소식이 돌고 나서 한참 지나 공표된 것은 미 행정부내 발간을 둘러싼 진통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공표된 NSS를 보면 우선 형식상에서 이전 보고서보다 그 분량이 1/3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그 내용과 표현방식도 아주 평이한 문체로 되어있어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 표현 방식과 밑에 깔린 사고방식을 보면 이 보고서는 국가적 전략서라기 보다는 트럼프의 생각이 강하게 반영된 트럼프의 개인적 전략서라는 느낌이 먼저 든다. 그의 1기 행정부 때 전략서와도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을 보면 이번 전략서가 트럼프의 속내를 잘 반영한 문건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왜냐하면 1기 행정부에서는 원로 참모들의 발언권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의 참모들은 거의 Yesman들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략서를 보면서 영화에서 무서운 장면이 나오기 전에 음울한 음악이 흐르는 장면을 떠올리게 된 것은 필자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 이 전략서는 이제 과거의 미국은 뒤안길로 사라지고 우리는 새로운 미국, 즉 자국만 생각하는 미국을 맞아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앞으로 펼쳐질 국제질서는 이전의 국제질서와는 완전히 다르며 과거 미국이 주도했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전략서는 미국이 세계를 떠받치던 아틀라스의 시대는 끝이 났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틀라스는 신들의 전쟁에서 패한 후 그 형벌로 우주를 떠받치는 힘든 책임을 맡게 되었다. 전략서는 미국을 아틀라스와 비교하고 우주를 과거의 국제질서로 비유하였다. 트럼프 생각을 담은 전략서는 미국이 이런 형벌을 계속 질 이유가 없다고 단정한다. 이런 국제질서 유지 부담 형벌을 미국에 지운 자들은 미국 대외정책 담당 엘리트들이라고 지목한다. 그들은 미국의 이익, 특히 중산층의 이익과 관계없는 결정을 마음대로 내렸다고 전략서는 비판한다. 그러므로 전략서는 미국은 앞으로 미국의 이익에만 집중할 것이고 이를 위해 다른 나라를 미국의 상업적, 산업적 이익에 봉사하도록 동원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미국이 져왔던 국제질서 유지 비용을 ‘다른 나라와 분담(burden -sharing)’한다는 생각에서 앞으로는 ‘다른 나라에 떠넘기기(burden-shifting)’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여태까지 국제질서 유지를 위하여 소위 공공재를 공급해왔던 미국, 즉 평화유지, 자유무역, 법치주의, 다자주의를 자기 비용으로 유지해 왔던 미국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미국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부흥을 돕고 질서유지를 위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번 전략서의 또 다른 특징은 미국 대외정책은 이제 ‘유연한 현실주의’에 입각할 것이라고 밝힌 점에 있다. 이 개념을 설명하면서 ‘실용주의자는 아니면서 실용적이고 현실주의자는 아니면서 현실적이고, 이상적이지는 않은데 원칙적’인 정책을 미국이 펼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 개념은 ‘과거의 전통적이고 정치적인 이념이나 주의에 얽매이지 않은 것’이라고도 했다. 결국 미국의 이익을 행동준칙으로 삼겠다는 것은 알 수 있으나 이런 상반된 표현을 결합함으로써 형용모순에 찬 준칙을 내건 것은 결국 기회주의적 대외정책을 하겠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결국 어떤 사안이 미국의 국익에 맞는지 그때마다 상황을 판단하면서 정책 결정을 하겠다는 말이다. 이는 미국을 믿고 있는 동맹국, 우방국들에게는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충격적인 개념이다. 왜냐하면 미국이 약속한 안보우산이 펼쳐질지는 상황이 닥쳐봐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전략서는 미국이 해외 개입을 할지에 대해서도 높은 기준을 설정하겠다고 하였다. 이는 가급적 미국은 ‘자유 재량정책(free hand policy)’을 취해서 누구에게 언제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는 동맹 여부와 관계없이 자국이 오로지 결정하겠다는 말이다. 이처럼 상황에 따라 유연한 현실주의, 즉 기회주의적 행동준칙을 택하겠다는 나라는 세계 지도국은 커녕 신뢰할 만한 동맹이 되기도 어렵다.
 
또한 이번 전략서의 지역전략 부분을 보면 미국이 먼로주의를 닮은 트럼프주의, 즉 일명 ‘던로주의(Donroeism)’를 추구할 것임을 명백히 하였다. 이는 미국이 서반구로 표현되는 미주대륙 지배권을 타국의 간섭없이 배타적으로 확고히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미국의 관심이 다른 지역보다 미주대륙에 우선 두어질 것이며 이는 미국의 기본 세계전략이 19세기 이전의 전통적 고립주의로 회귀할 것을 뜻한다. 물론 아.태지역에서 중국의 경제적 부상을 막고 군사적 대결을 회피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하지만 중국을 직접 겨냥한 표현은 자제하여 중국과의 패권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의지나 비전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대신 미주대륙에서는 타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미국의 우위를 지키겠다는 구상을 확실히 하였다. 전략서의 유럽 부분을 보면 유럽이 잘못된 가치판단으로 자신의 문명을 지워서 국가 정체성과 자신감을 상실한 대륙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그 결과로 전략서는 변화하는 유럽과 미국이 대서양 동맹을 지속해 나갈지 여부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번 전략서의 지역전략을 통해 드러난 신세계관을 유추해 보면 미국은 강대국들이 각자의 세력권을 통제하며 공존하는 다극체제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태 지역에서는 중국이 미국의 이익에 정면 도전하지 않는 한 중국과 공존하겠다는 생각을 내비치고 있다. 그러므로 서태평양 지역에 대한 미국의 안보공약도 점차 약화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이는 각국이 자기의 안보를 책임지는 시대가 왔다는 말이고 특히 서태평양에서 중국과 이웃한 나라들은 이런 미국의 변화가 던지는 질문의 의미를 심각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 유연한 현실주의와 던로주의에 입각하여 다극체제를 지향하는 미국을 동맹으로 둔 서태평양 지역국가들은 어떤 대응책을 취해야 하는지를 고민해 봐야 한다. 무엇보다 자국의 안보는 자국이 책임진다는 자세로 부국강병 정책과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해 나가야 한다. 우리 사회 일부에서는 미국과 한미동맹을 무한신뢰하는 경향이 있는데 신뢰의 미국은 이제 지나간 옛 노래가 되어 가고 있다. 과거의 시각으로 미래의 국가전략을 논하면 국가의 안보를 위태롭게 한다.
 
미국의 던로주의에 대응하여 위험회피 전략도 준비해야 한다. 우선 미국이 중국과 대결을 통해 현존 질서를 유지, 회복시킬 의지가 없다면 지역국가들도 중국과의 관계를 여기에 맞추어 설정해가야 한다. 이번 전략서는 지역동맹 국가들을 개별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그룹으로 묶어서 언급하고 있다. 이는 미국은 개별 동맹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고 대중국 견제에 필요한 세력 정도로 인식하고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지역국가들도 미국이 빠지는 공백을 자신들의 힘으로 메울 수 있도록 지역국가간 안보협력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한국, 일보, 호주, 인도 등이 주축이 되고 여타 동남아 국가들과 중첩적인 안보협력 구도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북한의 안보위협을 우리 스스로 해결해 나갈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재래식 공격뿐 아니라 핵공격에도 우리가 홀로 대처할 준비를 해나가야 한다. 북한의 위협을 군사적으로 해결할지 정치, 외교적으로 해결할지 여부도 심사숙고 해야 한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습관적 증오심이나 습관적 호감에 따라 타국을 대하는 국가는 이미 어느 정도 노예상태이다’라고 고별사에서 말했다. 급변하는 현 정세 속에서 새겨들어야 할 경구이다.
이백순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독문학과 △주미얀마 대사 △국회의장 외교 특임대사 △주호주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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