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총선 기간(1월 23일~2월 8일) 중 절반을 현지에 머물렀다. 공업도시 나고야를 비롯해 460년 전 역사의 향방을 결정지은 세키가하라, 그리고 도쿄와 인접한 시즈오카 일대를 오가며 의도치 않게 총선을 접했다. 현지 분위기는 차분했다. 대도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내가 머문 도시들에서는 총선 열기를 체감하기 어려웠다. 출퇴근 선거 유세도, 확성기 소리도, 군중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요란한 한국식 선거에 익숙한 내게는 낯설었다. 국민성이라기보다 정치 무관심이 낳은 풍광이었다. 일본 언론은 저조한 투표율은 자민당에 유리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조용한 선거’는 정치 지형을 바꿔 놓았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국회를 해산한 건 지난달 23일. 취임 3개월 만에 국회 해산은 역대 최단이었다. 그는 “과반을 못 얻으면 즉시 사임하겠다”며 배수진을 쳤다. 해산에서 투표까지 선거기간 16일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짧았다. 다카이치 내각 지지율은 71%로 역대 최고치였다. 다카이치는 높은 지지율을 등에 업고 국회 해산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결국 단독 과반(316석)에 성공했다. 일본유신회를 포함하면 352석이다. 개헌 의석(310석)을 훨씬 넘긴 압승은 1986년 이후 처음이다. 다카이치 내각은 국정 운영에서 주도권을 쥐게 됐다. 우경화 흐름이 가속화되지 않을까 하는 전망과 함께 한·일 관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다.
2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시라카와고는 북새통이었다. 마을은 관광객으로 가득했고 상점마다 줄이 이어졌다. 일본 경제가 침체라지만 이곳만 보면 딴 세상 같았다. 그러나 정작 주민들 관심은 선거가 아니라 생업과 관광에 쏠려 있었다. 선거 벽보는 배경에 불과했다. 이틀 뒤 찾은 세키가하라 들판은 또 달랐다. 460여 년 전 15만 대군이 맞붙었던 전쟁터라기엔 지나치게 한산했다. 세 시간 넘게 머무는 동안 마주친 선거 관련 장면은 유세차 한 대가 전부였다.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어 찾은 시즈오카현 야이즈 시청 사전투표소도 마찬가지였다. 긴 줄도, 긴장감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2·8 총선은 다카이치 총리 재신임 투표 성격이 강했다. 그는 취임 직후 ‘보통 국가화’와 헌법 9조 개정 의도를 감추지 않았다. 헌법 9조는 전쟁 포기와 군대 보유를 금지하고 있다. 자민당과 유신회는 자위대 존재를 헌법에 명기하는 법안을 추진할 계획이다. 이런 내용을 담은 개헌안을 3월까지 국회에 제출하겠다는 로드맵도 확정한 상태다. 자위대는 사실상 군대지만 제9조로 인해 법적 위상은 애매한 상황이다. 헌법에 명기하게 되면 군대 보유를 인정하고, 교전권도 헌법상 권리로 해석될 법적 근거를 갖추게 된다. 다카이치는 선거 유세에서 “자위대원들의 자긍심을 지키고 유능한 조직으로 인정하기 위해 개헌을 허락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 밖에 다카이치 내각은 재해나 무력 공격 시 내각에 입법 권한을 집중시키는 ‘긴급 사태 조항’ 신설도 추진 중이다. 또 방위비를 GDP 대비 2%로 증액하는 계획을 3월부터 실행하고, 장거리 미사일 도입 등 ‘반격 능력’도 공식화할 예정이다. 나아가 일본유신회는 미국 핵무기를 일본에 배치하는 ‘핵 공유(Nuclear Sharing)’ 공론화를 요구하고 있다. 자민당은 ‘비핵 3원칙’을 강조하고 있으나 중국 갈등과 북한 위협을 명분 삼아 후퇴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일본 유권자들이 자민당에 표를 몰아준 건 ‘강한 일본’을 지지한다는 뜻이다.
이번 선거에서 정치 지형을 바꾼 핵심 요인은 연정 파트너 교체다. 오랫동안 자민당에서 완충 역할을 했던 공명당은 물러나고 일본유신회가 전면에 섰다. 공명당은 그동안 평화헌법과 군사정책에서 제동을 걸어왔으나 일본유신회는 정반대다. 헌법 9조 개정에서 방위비 증액까지 거침없다. 자민당과 일본유신회 결합은 ‘절제’와 ‘합의’ 대신 ‘속도’와 ‘공세’로 대체될 우려를 낳고 있다. 브레이크가 사라지고 가속페달만 남은 셈이다. 입헌민주당과 공명당은 선거 직전 합당함으로써 이념과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소수 야당으로 전락했다.
우경화 흐름은 한·일 관계에 복합적인 신호를 보낸다. 단기적으로는 안정 가능성이 있다. 강한 리더십을 가진 양국 정부는 실리 중심 협력을 선호한다. 공급망 재편, 반도체 협력, 북핵 대응, 안보 공조 등 이해가 맞는 분야에서는 빠른 합의도 예상된다. 그러나 마냥 낙관하기 어렵다. 역사 문제와 독도, 야스쿠니 같은 민감한 이슈는 언제든 국내 정치용 카드로 활용될 수 있다. 지지율이 흔들릴 때마다 민족주의는 가장 손쉬운 동원 수단이다. 협력이 갈등으로 바뀌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실용 외교’와 ‘역사 갈등’이 공존하는 불안정한 균형을 예상할 수 있다.
한국은 갈등 과잉이고 일본은 갈등이 부족하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시끄럽게 싸우는 가운데 정책 방향을 결정하지만 일본은 조용히 합의하며 천천히 움직인다. 그러나 이번 총선 결과는 그런 공식마저 흔들 여지를 안고 있다. 합의가 아니라 일방적 수렴, 견제가 아닌 동질적 보수 연합이다. 반대 없는 개헌, 토론 없는 군비 확장, 제동 없는 권력 집중. 정치 무관심 속에서 치른 ‘조용한 선거’가 불러올 파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 속에서 일본은 힘이 없을 때는 타협했지만 반대의 경우 군국주의로 치달았다.
세키가하라 내전이 일본 역사의 분수령이었다면 이번 총선 역시 또 다른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함성도 격돌도 없는 ‘조용한 선거’였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일본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우경화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그 속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를지 모른다.
일본 기후현 세키가하라에서 순천향대학교 초빙교수 임병식
임병식 필자 주요 이력
▷순천향대 초빙교수 ▷전 국회의장실 부대변인 ▷전 국회의장 정무비서관 ▷전 국가균형발전위원회 국민소통위원 ▷국가유산청 정책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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