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도 칼럼] 뽑히지 않은 '전봇대'와 가로막힌 '태양광 이격거리'

  • 규제 개혁, 선언이 아닌 집행의 문제다

김학도 한국협업진흥협회 회장
[김학도 전 중소벤처기업부 차관/논설고문] 

 
 
2007년 12월, 비가 내리던 토요일 저녁. 당시 산업부 전력산업과장이었던 필자에게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로부터 긴급 전화가 걸려 왔다. “대불공단 교차로 전봇대는 왜 아직 안 뽑았느냐”는 질책이었다. 대통령 후보 시절 현장 간담회에서 업계 대표가 건의한 애로가 왜 해결되지 않았느냐는 취지였다.
 
사연은 이러했다. 선박 블록(패널)을 제조해 수출항으로 운반하는 과정에서, 도로 폭보다 넓은 패널을 실은 대형 트럭이 교차로를 통과하려면 전봇대가 걸림돌이 됐다. 결국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전봇대를 뽑았다가, 통과 후 다시 원위치시키는 작업을 매주 반복해야 했다. 기업은 불필요한 비용과 시간을 치르며 ‘규제’를 감당하고 있었다.
 
다음 날 일요일, 그 전봇대가 뽑히는 사진이 모든 언론을 장식했다. 이른바 이명박 정부 규제완화의 상징인 ’전봇대 규제’ 사건이다. 이 사건은 "현장에 답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었다. 규제란 책상에서가 아니라, 현장의 문제를 직접 확인하고 부딪치며 풀어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역대 정부는 출범 때마다 화려한 규제개혁 기구를 띄웠다. 김영삼 정부의 행정쇄신위원회, 김대중 정부의 규제개혁위원회, 박근혜 정부의 규제개혁 신문고까지, 규제 혁파는 늘 국정의 최우선 순위였다. 하지만 결과는 번번이 ‘용두사미’였다. 권한 축소를 우려한 관료의 저항과, 사회안전망 강화라는 명분 아래 신설 규제가 폐지되는 규제보다 더 많았기 때문이다. 전봇대 하나를 뽑는 단발성 조치로는, 현장의 구조적 규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재명 정부도 ‘실용주의’와 ‘결과 중심’을 내세우며 AI, RE100, 금융 등 전략산업을 겨냥한 규제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집권 2년 차에 접어든 지금, 현장 반응은 냉담하다. 과거 정부가 ‘기업 활력’을 전면에 내세웠다면, 현 정부는 공정·노동·사회적 책임을 우선 가치로 두면서 규제 완화가 성장 전략의 중심에서 다소 밀려난 모습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규제완화와 규제신설이 동시에 진행되며 ‘규제 총량’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노란봉투법, 상법 개정 등 노동·환경·지배구조 분야 규제가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면서 기업들은 “족쇄 하나를 풀면 쇠사슬이 두세 개 더 채워진다”고 느낀다. 기업 10곳 중 9곳이 규제 완화를 체감하지 못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오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규제 문제는 두 형태가 있다. 하나는 ‘입법 규제’, 다른 하나는 ‘집행 규제’다. 입법 규제는 본질적으로 통제에 한계가 크다. 국회의 의원 입법은 표심과 이해관계에 민감해 특정 집단의 요구가 법제화되기 쉽다. 규제로 이익을 보는 집단은 목소리가 크고 조직되어 있으나, 그 비용을 부담하는 기업과 편익을 누릴 미래의 다수는 분산되어 있다. 혁신 플랫폼이 시장의 선택을 받자,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사후 입법으로 길을 막아버린 과거 ‘타다 금지법’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장에서 기업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법 자체보다 '집행 규제'다. 필자가 2017년 산업부 에너지자원실장으로 경험한 ‘태양광 설치 이격거리’가 그렇다. 중앙정부의 가이드라인에도, 지자체는 민원을 피하기 위해 조례로 50~100m 이상의 과도한 이격거리를 설정해 사실상 설치를 불허했다. 지난 2월 「재생에너지법」 개정으로 이격거리 규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네거티브 방식이 도입된 것은 진전이지만, 현장 인허가 담당자가 민원을 이유로 허가를 늦추거나 우회 규제를 이어간다면 체감도는 ‘0’에 수렴할 수밖에 없다. 규제 개혁은 법을 고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집행이 바뀌지 않으면 정책은 죽은 글자다.
 
따라서, 이재명 정부의 규제 개혁은 ‘정부가 무엇을 해 주겠다’는 시혜적 접근에서 벗어나, 기업이 마음껏 뛸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드는 ‘시스템 개혁’으로 진화해야 한다.
 
첫째, ‘포괄적 네거티브 규제시스템’의 확대가 필요하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규제를 네거티브 중심으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아직까지 구체적 방향과 실행 설계는 충분히 제시되지 않았다. 법에 적힌 것만 허용하는 포지티브 방식으로는 AI 등 신산업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금지된 것 외에는 허용하는 원칙을 신산업 전반에 세워야 한다.
 
둘째, 집행 규제를 통제할 '강력한 컨트롤타워' 복원이다. 최근 규제 정책의 최상위 심의기구인 규제합리화위원회가 민간위원 위촉을 통해 진용을 정비했다. 위원회의 성패는 거창한 법률 개정 심의가 아니라, 현장에서 작동하는 집행 규제를 어떻게 잡아내고 솎아내는가에 달려 있다. 전봇대처럼 현장에 ‘박혀 있는’ 규제가 무엇인지 찾아내고, 부처간 칸막이와 소극 행정을 뚫어내야 한다.
 
국회의 입법 규제는 통제에 한계가 있는 만큼, 현실적으로 정부가 조정가능한 시행령·시행규칙 등 하위 규범의 심의·개정 과정에서 규제합리화위원회가 합리적 타결점을 반영하도록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 부처가 스스로 완화하기 어려운 규제일수록, 위원회와 총리실이 ‘조정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 지속적인 ‘감시와 점검의 시스템’이 필요하다. 최근 대통령 국무회의나 기관 업무보고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은 관행을 깨고 현장의 집행 규제를 풀어가는 데 도움이 될수 있다. 아니면 복지부동의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이벤트로 끝나면 전봇대처럼 상징으로만 남는다. 총리실을 중심으로 규제 개선을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성과를 누적·관리하는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기업에게 규제 완화는 글로벌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 장비다. 기업이 체감하지 못하는 규제 완화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재명 정부는 실용주의를 표방한 만큼, 현장의 목소리가 입법과 행정으로 즉각 반영되는 ‘피드백 루프’를 강화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선언이 아니다. 현장의 전봇대를 뽑아낼 수 있는 ‘입법의 용기’와, 뽑힌 자리에 다시 규제가 자라나지 못하게 막는 ‘집행의 시스템’이다. 빗속을 뚫고 전봇대를 뽑으러 달려갔던 그 절박함이 단발성 퍼포먼스에 그치지 않고, 행정의 말단 조직까지 흐르는 제도적 장치로 정착될 때 비로소 대한민국 경제의 엔진은 다시 힘차게 돌 수 있을 것이다.

김학도 필자 주요 이력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 정치경제학 박사 △전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자원실장 통상교섭실장 △전 중소벤처기업부 차관 △전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이사장 △현 한국협업진흥협회 회장 △현 충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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