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칼이다. 그러나 그 칼은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느냐에 따라 정의가 되기도 하고 폭력이 되기도 한다. 검사는 그 칼을 쥔 사람이다. 그러므로 검사의 본령은 권력에 복무하는 데 있지 않고, 권력을 제어하는 데 있다. 그 칼끝이 국민을 향하는 순간 국가는 병들고, 그 칼끝이 권력을 향할 때 법치는 살아난다.
이번 정재인 검사의 논고와 박성재 전 장관에 대한 징역 20년 구형은 단순한 형량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검찰의 존재 이유를 묻는 질문이며, 법치주의의 방향을 가늠하는 시금석이다. 재판의 결론을 예단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특검의 구형과 법정에서 드러난 정황, 그리고 한국 검찰이 걸어온 궤적을 통해 검사의 본령을 다시 묻고자 한다.
특검은 박 전 장관이 비상계엄 국면에서 헌법적 통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법무부 조직을 통해 관련 조치를 준비하도록 했다는 취지로 기소하고 징역 20년을 구형했다. 계엄이라는 국가의 극단적 권력 행사가 논의되던 순간, 법률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양심이다. 법을 가장 잘 아는 자가 법의 경계를 지켜야 한다. 그런데 법률 지식이 오히려 권력의 실행을 정교하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 순간 법은 외피만 남고 정신은 사라진다.
계엄의 본질은 군사적 조치가 아니다. 그것은 헌정 질서의 마지막 안전장치다. 따라서 이를 다루는 모든 과정은 헌법의 엄격한 통제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특검이 제기한 바와 같이, 합동수사본부 검사 파견 검토, 출국금지 준비, 교정시설 수용 여력 점검 등 일련의 조치가 사실이라면 이는 단순한 행정 대응이 아니라 권력 행사의 사전 정비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문제는 법이 권력을 견제하는 장치가 아니라, 권력을 실행하는 장치로 기능했을 가능성이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에는 군인이 전면에 서고 법률가는 그 뒤를 정리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오늘의 권력 구조에서는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 법률가는 더 이상 조연이 아니라, 때로는 권력의 구조를 설계하는 위치에 선다. 법의 언어로 불법을 합리화하는 순간, 폭력은 질서로, 억압은 행정으로 위장된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이른바 ‘법기술자’다. 법의 정신이 아니라 기술에 의존하는 사람들, 정의가 아니라 결과를 설계하는 사람들이다.
정재인 검사의 논고가 울림을 준 이유는 바로 이 지점을 겨냥했기 때문이다. 그의 논고는 개인의 일탈을 넘어, 법률가 집단 전체의 자기 성찰을 요구한다. 그는 권한 남용을 사적 이익을 위한 공권력 행사로 규정했고, 내란 방조를 소극적 책임이 아니라 적극적 책임의 문제로 끌어올렸다. 특히 “법의 이름으로 법을 파괴하는 행태”에 대한 경고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한국 법조계에 대한 경종이다.
여기서 우리는 법조의 원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법조삼성은 단순히 검사·판사·변호사의 직역이 아니다. 그것은 해방 이후 한국 법조를 정도로 이끌었던 세 어른, 가인 김병로, 화강 최대교, 바오로 김홍섭을 가리킨다. 김병로는 사법권 독립을 몸으로 세운 인물이었고, 최대교는 검찰이 권력의 시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지켰으며, 김홍섭은 법정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판결로 기억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법을 기술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법은 인간을 위한 것이며, 권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그들의 중심에 있었다. 그들에게 법은 출세의 수단이 아니라 양심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이와 거리가 있다. 검찰은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었지만, 그 권한을 둘러싼 유혹 또한 커졌다. 정치권력과의 결합, 전관 시장을 통한 자본과의 연결, 사건을 경력 관리의 도구로 바라보는 시각은 검사의 본질을 훼손해 왔다.
실제 사례들은 이를 보여준다. 김광준 전 부장검사 사건은 수사 대상과 관련된 인물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으로, 검찰 내부의 윤리 문제를 드러냈다.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이른바 ‘스폰서 검사’ 사건 역시 물의를 일으키며, 검사 사회의 연고·청탁 구조를 드러냈다. 진경준 전 검사장 사건은 자본과 권력의 결합이 어떻게 법조 엘리트의 판단을 흐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일부 혐의는 무죄 판단을 받았으나 다른 범죄로 실형이 확정되며 사회적 신뢰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 사건들의 본질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구조적 문제다. 검사라는 직업이 권력과 자본의 교차점에 서 있을 때, 그 중심을 지키지 못하면 법은 흔들린다. 법이 흔들리면 국민은 정의를 믿지 않게 되고, 정의를 믿지 않는 사회는 결국 힘의 논리에 지배된다.
그래서 우리는 한승헌 변호사를 떠올린다. 그는 검사, 변호사, 로스쿨 교수, 그리고 피고인으로서 법조인의 전 생애를 살아낸 인물이었다. 권력의 편이 아니라 인간의 편에 섰고, 법의 기술이 아니라 법의 정신을 지키려 했다. 그의 삶은 말한다. 법률가는 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이라고.
검사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권력인가, 국민인가. 돈인가, 양심인가.
검사들이여, 기본으로 돌아가라. 법조삼성이 남긴 정신으로 돌아가라. 권력 앞에서 굽히지 않았던 김병로의 용기, 검찰의 양심을 지켰던 최대교의 절제, 인간의 존엄을 지킨 김홍섭의 따뜻함, 그리고 한승헌의 인권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법은 기술이 아니다. 법은 양심이다. 검사는 권력의 칼잡이가 아니라, 국민의 공복이다. 이 기본을 잃은 검사는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법조인이 아니다. 이 기본을 지킨 검사는 비록 이름 없는 자리에서도 이미 법의 중심에 서 있다.
이번 정재인 검사의 논고와 박성재 전 장관에 대한 징역 20년 구형은 단순한 형량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검찰의 존재 이유를 묻는 질문이며, 법치주의의 방향을 가늠하는 시금석이다. 재판의 결론을 예단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특검의 구형과 법정에서 드러난 정황, 그리고 한국 검찰이 걸어온 궤적을 통해 검사의 본령을 다시 묻고자 한다.
특검은 박 전 장관이 비상계엄 국면에서 헌법적 통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법무부 조직을 통해 관련 조치를 준비하도록 했다는 취지로 기소하고 징역 20년을 구형했다. 계엄이라는 국가의 극단적 권력 행사가 논의되던 순간, 법률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양심이다. 법을 가장 잘 아는 자가 법의 경계를 지켜야 한다. 그런데 법률 지식이 오히려 권력의 실행을 정교하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 순간 법은 외피만 남고 정신은 사라진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에는 군인이 전면에 서고 법률가는 그 뒤를 정리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오늘의 권력 구조에서는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 법률가는 더 이상 조연이 아니라, 때로는 권력의 구조를 설계하는 위치에 선다. 법의 언어로 불법을 합리화하는 순간, 폭력은 질서로, 억압은 행정으로 위장된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이른바 ‘법기술자’다. 법의 정신이 아니라 기술에 의존하는 사람들, 정의가 아니라 결과를 설계하는 사람들이다.
정재인 검사의 논고가 울림을 준 이유는 바로 이 지점을 겨냥했기 때문이다. 그의 논고는 개인의 일탈을 넘어, 법률가 집단 전체의 자기 성찰을 요구한다. 그는 권한 남용을 사적 이익을 위한 공권력 행사로 규정했고, 내란 방조를 소극적 책임이 아니라 적극적 책임의 문제로 끌어올렸다. 특히 “법의 이름으로 법을 파괴하는 행태”에 대한 경고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한국 법조계에 대한 경종이다.
여기서 우리는 법조의 원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법조삼성은 단순히 검사·판사·변호사의 직역이 아니다. 그것은 해방 이후 한국 법조를 정도로 이끌었던 세 어른, 가인 김병로, 화강 최대교, 바오로 김홍섭을 가리킨다. 김병로는 사법권 독립을 몸으로 세운 인물이었고, 최대교는 검찰이 권력의 시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지켰으며, 김홍섭은 법정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판결로 기억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법을 기술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법은 인간을 위한 것이며, 권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그들의 중심에 있었다. 그들에게 법은 출세의 수단이 아니라 양심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이와 거리가 있다. 검찰은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었지만, 그 권한을 둘러싼 유혹 또한 커졌다. 정치권력과의 결합, 전관 시장을 통한 자본과의 연결, 사건을 경력 관리의 도구로 바라보는 시각은 검사의 본질을 훼손해 왔다.
실제 사례들은 이를 보여준다. 김광준 전 부장검사 사건은 수사 대상과 관련된 인물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으로, 검찰 내부의 윤리 문제를 드러냈다.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이른바 ‘스폰서 검사’ 사건 역시 물의를 일으키며, 검사 사회의 연고·청탁 구조를 드러냈다. 진경준 전 검사장 사건은 자본과 권력의 결합이 어떻게 법조 엘리트의 판단을 흐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일부 혐의는 무죄 판단을 받았으나 다른 범죄로 실형이 확정되며 사회적 신뢰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 사건들의 본질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구조적 문제다. 검사라는 직업이 권력과 자본의 교차점에 서 있을 때, 그 중심을 지키지 못하면 법은 흔들린다. 법이 흔들리면 국민은 정의를 믿지 않게 되고, 정의를 믿지 않는 사회는 결국 힘의 논리에 지배된다.
그래서 우리는 한승헌 변호사를 떠올린다. 그는 검사, 변호사, 로스쿨 교수, 그리고 피고인으로서 법조인의 전 생애를 살아낸 인물이었다. 권력의 편이 아니라 인간의 편에 섰고, 법의 기술이 아니라 법의 정신을 지키려 했다. 그의 삶은 말한다. 법률가는 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이라고.
검사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권력인가, 국민인가. 돈인가, 양심인가.
검사들이여, 기본으로 돌아가라. 법조삼성이 남긴 정신으로 돌아가라. 권력 앞에서 굽히지 않았던 김병로의 용기, 검찰의 양심을 지켰던 최대교의 절제, 인간의 존엄을 지킨 김홍섭의 따뜻함, 그리고 한승헌의 인권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법은 기술이 아니다. 법은 양심이다. 검사는 권력의 칼잡이가 아니라, 국민의 공복이다. 이 기본을 잃은 검사는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법조인이 아니다. 이 기본을 지킨 검사는 비록 이름 없는 자리에서도 이미 법의 중심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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