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정의 문화단상] 프랑스가 선택한 박찬욱…'국격' 높인 문화훈장의 무게

박찬욱 감독 사진연합뉴스 로이터
박찬욱 감독 [사진=연합뉴스·로이터]

프랑스 문화계의 자부심은 유별나다. 자국 예술을 최우선으로 치는 그들이 이방인에게 최고 권위의 문화예술공로훈장을 내어주는 일은 드물다. 박찬욱 감독이 이 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을 수훈한 한국인은 박 감독까지 단 네 명에 불과하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일찌감치 그를 '깐느 박'이라 부르며 각별한 애정을 쏟아온 프랑스 문화계의 행보를 되짚어보면 예견된 수순일지 모른다. 그러나 국가 차원에서 수여하는 최고 등급의 훈장이 지니는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는 이번 수훈을 그저 K무비의 흥행이나 K컬처 유행쯤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대한민국의 문화적 깊이가 서구 주류 사회의 깐깐한 잣대를 충족했음을 인정받은, 일종의 외교적 성과다. 국가의 격(格)이 한 단계 올라섰다는 의미다. 과거 경제 성장률과 수출 지표만으로 선진국 반열에 올랐음을 증명하려 했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사상과 철학을 담아낸 문화 예술이 그 나라의 진정한 성숙도를 대변한다. 서구 사회의 일방적인 문화 수용국이었던 한국이 이제는 그들에게 영감과 철학적 화두를 던지는 발신국으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다.

세계 영화계에 거장은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프랑스가 유독 박찬욱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프랑스 평단이 추앙하는 '작가주의'의 정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2004년 영화 '올드보이'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거머쥐며 세계 무대에 신선한 충격을 안긴 이후, '박쥐', '아가씨', '헤어질 결심'에 이르기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안일한 자기 복제에 머물지 않았다.

그의 렌즈는 욕망, 죄와 벌, 구원 같은 인간의 짙은 그늘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또 파격적인 소재를 압도적인 미장센으로 통제하며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영화를 예술이자 철학으로 대하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갈증을 채워준 셈이다. 한국적 정서로 포장하되, 세계인이 공감하는 보편적 미학을 끄집어낸 독창성이 그를 거장의 반열에 올렸다. 할리우드의 막대한 자본력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치밀한 세공력과 화면의 질감 하나까지 통제하는 완벽주의는 콧대 높은 서구 영화계마저 경외감을 표하게 만들었다.

이번 수훈의 의미는 K팝 아이돌이나 드라마의 상업적 성공과는 명확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타고 빠르게 소비되고 휘발되는 팝콘 콘텐츠가 한국 콘텐츠 산업의 외연을 넓혔다면, 박 감독과 같은 작가주의 감독들의 뚝심은 K컬처의 내실을 다지고 영속성을 부여한다. 단일 프로젝트로 수백억원의 수익을 내고 수천만명의 글로벌 팬덤을 모으는 산업적 파워도 물론 중요하지만, 한 국가의 철학과 미학이 세계 중심부에서 존중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잘 만든 예술 작품 하나, 철학을 지닌 거장 한 명은 수십 명의 외교관보다 강한 힘을 발휘한다.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입지와 발언권을 키우는 핵심 소프트파워다. 문화를 단지 돈벌이 수단이 아닌 국격의 척도로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잘 벼려진 문화적 자산은 세대를 초월해 전승되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치가 배가되는 법이다.

훈장의 영광에만 취해 박수 치고 끝낼 일이 아니다. 당장 한국 영화계의 척박한 현실을 돌아보면 씁쓸함이 앞선다. 현재 한국 영화계는 극심한 한파를 겪고 있다. 팬데믹 이후 치솟은 티켓 가격과 글로벌 OTT의 거센 공세 속에서 극장가는 철저하게 양극화됐다. 수백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들마저 줄줄이 고배를 마시고 투자 자본은 급격히 얼어붙었다. 철저한 자본 논리에 잠식된 시장 속에서 결국 안전한 흥행 공식과 스타 캐스팅에만 의존하는 기획 영화들이 양산되며 창작의 다양성은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이런 획일화된 시스템 속에서 과연 '제2의 박찬욱'이 탄생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신선한 시각과 도발적인 문법을 제시해야 할 신진 감독들의 독립·예술 영화들은 상영관조차 잡지 못해 관객과 만날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실정이다.

거장의 탄생은 개인의 천재성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무모해 보이는 시도조차 허용되고, 신진 창작자들이 뼈아픈 실패를 딛고 다시 카메라를 잡을 수 있는 든든한 토양이 필수적이다. 문화체육관광부 등 정부 차원의 실효성 있는 창작 지원과 모태펀드 확충, 그리고 스크린 독과점 구조를 개선하려는 업계 전반의 자정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프랑스가 박찬욱에게 보낸 경의는, 위태로운 생태계를 방치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를 향한 뼈아픈 지적이기도 하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 가려진 짙은 그림자를 직시하지 않는다면, 한국 영화의 황금기는 한낱 과거의 영광으로 저물 수 있다. 훈장의 묵직한 무게감을 산업 전반의 체질 개선으로 승화시키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진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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