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준은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할 만큼 했습니다. 이제는 그만하려고 합니다.'
체념이 묻어나는 제목의 영상이었다. 그는 한국을 "마음의 고향", "어머니 같은 나라"라고 불렀다. 그러면서도 "이제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고 전했다. 24년간 이어진 병역 기피 논란과 입국 문제를 내려놓겠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정말 아무 의미가 없다면 굳이 다시 말할 이유도 없다. 정말 내려놓았다면 카메라를 켜고 "그만하려 한다"고 선언할 필요도 없다. 이 모순은 유승준이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첫 번째 단서다. 그의 말은 늘 사과와 해명, 체념과 미련, 책임과 억울함 사이를 오갔다.
유승준은 사과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2015년 그는 인터넷 생방송에서 "변명의 자리가 아니라 사죄하는 자리"라며 무릎을 꿇었다.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군대에 가겠다"고도 전했다.
하지만 사과는 반송됐다. 유승준은 왜 사과했는데도 용서받지 못했을까. 그리고 유승준은 왜 용서받지 못한 뒤 다시 억울함의 언어로 돌아갔을까.
대중이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병역 미이행 때문만은 아니다. 대중은 '군대에 가지 않은 사람'보다 '가겠다고 말해놓고 떠난 사람'에게 분노했다. 유승준은 건강하고 성실한 청년의 상징이었다. 공개적으로 병역 이행 의사를 밝혔고, 대중은 그 말을 그의 이미지 일부로 받아들였다. 이후 미국 시민권 취득과 병역 미이행은 신뢰 파기의 장면으로 굳어졌다.
유승준 논란을 움직인 감정의 중심축은 약속이었다. '어떤 믿음을 깨뜨렸는가', '대중은 왜 나를 배신자로 기억하게 됐는가', '내가 잃은 것보다 먼저, 내가 무너뜨린 것은 무엇인가'…대중은 이 시선의 방향을 봤다.
하지만 유승준의 말은 가끔씩 다른 곳을 향했다. 그는 사과했다. 그러나 곧 자신이 얼마나 오래 고통받았는지 이야기했다. 그는 후회한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처벌이 과도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을 그리워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큰 의미가 없다"고도 했다. 그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하면서도 "왜 나에게만 이렇게까지 하느냐"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24년 동안 한 사건으로만 호명되고, 여러 차례 사과했지만 그 사과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누구나 억울할 수 있다. '내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나는 평생 괴물로만 기억돼야 하나'…인간적인 감정이다. 다만 사과의 자리에 자기 고통이 들어서면, 대중은 그것을 반성이 아닌 자기변호로 읽는다.
유승준의 내면에는 두 문장이 충돌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잘못했다.'
'하지만 나는 괴물은 아니다.'
이 두 문장이 부딪히는 순간,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가 생긴다. 인지부조화란 자신이 믿는 자기상과 현실의 평가가 어긋날 때 생기는 심리적 불편이다. '나는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는 자기상과 '나는 약속을 깨뜨린 배신자로 기억된다'는 사회적 평가가 충돌하면, 사람은 그 간극을 줄이려 한다. 계속 설명하고, 맥락을 붙이고, 자신의 고통을 말한다.
2020년 이른바 '유승준 방지법' 발의 당시 유승준의 반응은 이 심리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제가 공공의 적이냐"며 반발했고, "한물간 연예인 하나가 한국에 들어오는 걸 이렇게 막으려고 난리법석이냐"면서 항의했다.
겉으로는 분노였지만, 아래에 다른 감정이 숨어 있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인가.'
'나 하나를 막기 위해 법까지 이야기할 정도인가.'
'나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악으로 기억되고 있는가.'
억울함이기도 하지만, 자기상 붕괴에 대한 두려움도 드러난다. 어쩌면 유승준은 어느 순간부터 용서만을 원한 게 아닐 수도 있다.
처음에는 용서를 원했을 것이다. 한국에 돌아오고 싶었을 것이고, 다시 받아들여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흐르면 용서의 욕망은 다른 형태로 변한다. 어느 순간부터 '나를 받아달라'보다 '적어도 나는 괴물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알아달라'는 말로 변한다.
유승준은 자신이 영원한 배신자나 공공의 적으로만 남지 않기를 바랐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대중은 그 확인을 내주지 않았다. 대중에게 유승준은 여전히 '약속을 믿게 한 뒤 떠난 사람'이다. 그가 아무리 오래 고통을 말해도, 대중의 첫 장면은 바뀌지 않았다.
유승준과 대중은 서로 다른 문장을 붙잡고 있다. 유승준은 '나는 괴물이 아니다'를 확인받고 싶고, 대중은 '당신은 먼저 우리의 믿음을 깨뜨렸다'에 머문다. 유승준은 현재의 고통을 말하고, 대중은 과거의 약속을 말한다. 유승준은 낙인에서 벗어나려 하고, 대중은 그 낙인이 생긴 이유를 본다.
그래서 그의 사과는 계속 미끄러진다. 그는 사과와 해명 사이를 떠돌고, 대중은 그 떠돎을 다시 자기방어로 읽는다.
이는 서사 정체성(Narrative Identity)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로 삶을 엮는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내가 어떤 일을 했는가'만이 아니라 '그 일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의해 구성된다.
유승준에게 병역 논란은 인생 전체를 덮어버린, 오염된 서사다. 성실한 청년, 성공한 가수, 이민자, 가족을 책임진 사람이라는 여러 정체성이 한 장면에 압도됐다. 병역 기피자, 배신자, 입국 금지된 사람. 그의 다른 이야기는 모두 이 이름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사람은 인생이 하나의 낙인으로 축소될 때 버티기 어렵다. 그래서 다시 말한다. 설명한다. 맥락을 붙인다. 자신이 받은 고통을 강조한다. 그렇게라도 자기 서사를 되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은 재서사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오래 붙잡아온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는 그를 믿었다. 그는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떠났다.'
이 문장은 24년간 거의 닳지 않았다. 장면은 단순해지고, 단순해진 장면은 더 강해졌다.
한 사람의 이름이 하나의 사건으로 굳어질 때, 낙인 정체성(Stigmatized Identity)은 선명해진다. 한 사람이 특정 사건이나 결함으로만 규정될 때, 그는 더 이상 복합적인 개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유승준은 대중에게 하나의 인간이라기보다 하나의 상징이 됐다. 병역을 둘러싼 배신감, 공정성에 대한 분노, 약속을 어긴 사람에 대한 불신이 모두 그의 이름 위에 쌓였다.
이때 당사자는 두 겹의 고통을 겪는다. 하나는 자신이 실제로 저지른 선택에 대한 책임이다. 다른 하나는 그 선택 하나로 자기 전체가 고정되는 고통이다. 첫 번째는 감당해야 할 몫이다. 두 번째는 인간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낙인이다.
유승준의 말이 흔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책임에서 도망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낙인으로 고정되는 것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잘못했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대중은 두 번째 문장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의 억울함이 나오는 순간 '아직도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 모른다'고 느낀다.
유승준이 영원히 억울함을 감춰야 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사과하면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냐"는 반응이 돌아왔고, 해명하면 "또 변명한다"는 말이 따라붙었다. 침묵하면 반성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고, 억울함을 말하면 피해자 행세를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사과만 했어야 했다"고 말하는 건 쉽지만, 너무 단순한 결론이다. 24년간 한 사건으로 질타받는 사람에게 억울해하지 않길 바라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다만 사과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후 유승준은 스스로에게 다른 질문을 던져야 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대신 '용서받지 못하는 나를 어떻게 견딜 것인가'를 묻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떤 태도로 남을 것인가'를 배워야 했을지 모른다. 나아가 자신을 오해받은 사람의 자리에 붙들어두려는 마음, 그 오래된 자기방어, 대중의 기억을 끝내 수정하고 싶어하는 욕망… 그것까지 함께 내려놓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대중도 한 사람의 후회와 자기방어가 어떻게 뒤섞이는지 들여다볼 필요는 있다. 그를 무조건 용서하자는 뜻이 아니다. 이해해보자는 뜻이다. 이해는 비판을 멈추자는 요구가 아니라, 비판 대상을 정확히 보자는 요청이다.
유승준의 비극은 한 사람의 잘못과 한 사회의 기억이 24년간 엉켜버린 이야기다. 그는 대중 앞에서 약속을 깨뜨린 사람이었다. 동시에 그 약속 하나로 평생의 서사가 고정된 사람이었다. 사과가 반복적으로 거부될수록, 그는 더 낮아지기보다 더 많이 설명하려 했을 것이다. 잘못을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그 잘못 하나로만 끝나는 인간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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