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가 여러 사람을 불쾌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 보는 건, 아직 살아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영화 ‘69세’는 29세 남자 간호조무사에 성폭력을 당한 69세 심효정(예수정)의 내면과 사건의 흐름을 어둡게 따라간다. 영화는 불편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노인은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없는가?’라는 물음말이다.
물리치료를 받던 중 성폭력을 당한 효정은 쉽게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특유의 단단함으로 차분하게 자신의 일상을 유지하려 한다. 피해자인 그를 향한 무차별적인 2차 가해에도 효정은 무너지지 않고 “왜 내가 침묵해야 하는가”라며 세상의 편견과 조용히 싸워 나간다.
그러나 효정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 과정이 절대 쉬운 것은 아니다. 효정이 도움을 받아야 할 경찰과 병원 등 기관에선 “그 나이에 무슨 성폭력이냐”, “젊은 남자가 굳이 왜 노인에게 범행을 하겠는가”, “착각한 것 아니냐”며 2차 가해를 서슴지 않는다.
법원은 효정과 정반대 진술을 한 29세 가해자에 대해 “여성 노인에게 성욕을 느낄 개연성이 부족하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해 버린다. 덕분에 효정은 어디서든 자신에게 성폭력을 가한 상대와 부딪힐 수 있는 가능성마저 커졌다.
실제 이와 비슷한 사건은 현실에서도 일어난다. 지난 2019년 여성 노인 성폭행 사건과 관련 광주고등법원이 판결한 판결문에는 “피해자가 사회 경험이 풍부한 67세 여성인 점과 당시 수사기관 진술 내용 및 신고 경위에 비춰 보면 피해자가 느낀 정신적 충격이나 성적 수치심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2021년에도 90대 여성이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신고가 접수됐지만 피해자가 고령이고 치매를 앓고 있다는 점 때문에 피해자의 속옷에서 남성의 DNA가 검출됐음에도 경찰은 이 사건을 증거불충분으로 불송치 결정했다.
사회는 노인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하다. ‘69세’를 연출한 임선애 감독은 BBC 인터뷰를 통해 “(극중 효정이 수영하는 장면을 본 여성들의 발언 중) 흔히 ‘처녀같다’‘몸매가 좋다’ 이런 얘기를 칭찬이라고 생각해 자신은 ‘가해를 하지 않았다’고 착각하는 경우들이 있다”며 “노인이라는 인식에 ‘당연히 아름다울 수 없다’는 전제가 있기에 폭력적인 언어가 이뤄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화 전반의 분위기는 임 감독의 말처럼 효정을 피해자로 보기보다 노인으로 보고, 그의 증언보단 그의 나이에 겪을 만한 인지능력 저하 가능성을 의심한다. 마치 노년의 몸은 더 이상 성폭력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늙어간다는 것,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것
영화는 효정이 나아가는 길마다 즐비한 ‘노인’이라는 인식에서 오는 평범한 일상 속 가해성을 끊임없이 꼬집는다. 감독 역시 범죄의 자극성보단 노년 여성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사회의 태도를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다.
노인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 만큼 효정은 그보다 더 자신의 매무새를 다듬는다. 가난하지만 누군가에게 기대려 하지 않고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는 의지를 보인다. 영화 속에서 효정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다. 우리 주변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노인이다.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예수정 배우는 효정을 과장된 비극의 인물이 아닌 생활인으로 그려내는 데 집중했다. 감정을 폭발시키기보다 차분하게 상황을 견디고 주시한다. 표정 변화 또한 별로 없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그의 붉어지는 눈빛에서 오롯이 느껴진다. 그건 아마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의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온 효정의 인생이 녹아든 것이리라.
현실에서 역시 효정과 같은 이들이 많다. 대가족은 해체되고 개인화 되면서 각자 살 길을 찾기 바쁜 사회로 변모한 지 오래다. 사회는 점차 고령화 되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정책은 많지 않다. 사회적 인식 또한 이에 미치지 못한다. 2023년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60세 초과 노인 대상 범죄는 15만 7314건에서 17만 2053건으로 증가했다.
특히 홀로 사는 노인들을 향한 성폭력은 더더욱 알려지기 쉽지 않다. 성폭력을 당해도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보단 주변의 인식이 무서워 알리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아 쉬쉬하다보니 밝혀지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년 여성 노인 1인 가구수는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통계청의 ‘2024 고령자 통계’를 보면 2015년 122만 3000만 가구에서 2023년에는 213만 8000가구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중 여성 노인 1인 가구 비중은 69%로, 노인 10명 중 7명이 여성인 셈이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욕망과 감정, 존엄까지 사회로부터 박탈당해선 안된다. 영화의 제목이 ‘69세’인 이유는 효정에게 붙는 가장 강력한 꼬리표가 이름도, 직업도 아닌 나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심효정이 아닌 '69세의 여성'을 본다.
영화 ‘69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존엄은 나이와 상관없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젊음은 영원할 수 없다.
결국 누구든 노인이 되는 길은 막을 수 없다. 어느 순간 몸이 쇠하고, 인지능력이 떨어지거나 눈이 침침해진다. 오십견으로 인해 어깨를 올릴 수 없을 만큼 거동이 불편해지거나 허리를 숙이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관절이 아플 수도 있을 것이다. 노년의 일은 특별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신체적 변화로 인해 오는 현실적 불편함 또한 우리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미래다. 우린 모두 나이가 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렇기에 죽을 때까지 우리 모두는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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