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인간의 지능을 모방하지만 인간의 양심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알고리즘은 계산할 수 있지만 사랑할 수는 없고, 로봇은 노동을 대신할 수 있지만 봉사할 수는 없다. 기술은 효율을 높일 수 있지만 공동체를 저절로 만들지는 못한다. 결국 문명을 지탱하는 마지막 힘은 사람의 마음이며, 서로를 향한 신뢰와 책임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크교는 500여 년 전부터 오늘의 인류에게 답을 준비해 왔다. 구루 나낙은 신앙이란 기도만이 아니라 정직하게 일하고, 얻은 것을 나누며, 약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라고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 AI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의 윤리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생성형 AI는 지식을 민주화하고 있다. 누구나 방대한 정보를 얻고, 누구나 새로운 창작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지식이 늘어날수록 지혜가 함께 커지는 것은 아니다. 정보가 넘칠수록 거짓도 함께 늘어난다. 속도는 빨라졌지만 성찰은 오히려 줄어드는 역설도 나타난다. 그래서 오늘날 세계는 AI 윤리와 디지털 신뢰를 새로운 문명의 과제로 삼고 있다.
오늘날 ESG 경영이 세계 경제의 핵심 화두가 된 것도 같은 이유이다.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를 중시하는 경영은 결국 기업도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시크교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노동은 신성한 의무이며, 부는 사회와 나눌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고 가르쳐 왔다. 기업은 돈을 버는 곳인 동시에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생각은 오늘날 지속가능경영의 철학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세계 곳곳에서 시크교 공동체가 재난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이동식 주방을 열고 무료 급식을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봉사를 자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봉사는 신앙이며,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가장 거룩한 예배라고 믿는다. 한 그릇의 따뜻한 음식은 굶주린 사람의 생명을 살릴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킨다.
이러한 시크교의 정신을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우리 시대의 큰 사상가인 다석 유영모가 떠오른다. 다석은 "진리는 하나이고, 사람은 모두 한 생명"이라는 사상을 평생 실천하였다. 그는 종교를 나누기보다 종교를 관통하는 생명의 본질을 찾고자 했다. 기독교를 공부하면서도 불교와 유교, 노장사상을 함께 탐구하였고, 동서양의 지혜를 하나의 생명 철학으로 통합하려 했다.
다석은 "없이 계신 하느님"을 말하였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만물 속에 살아 계시는 존재, 인간의 양심과 생명 속에서 역사하는 하느님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사상은 형식보다 삶을 중시한 구루 나낙의 가르침과도 깊이 통한다. 시크교 역시 하나님은 특정 민족이나 특정 종교만의 신이 아니라 온 인류의 창조주라고 믿는다.
다석은 또 "먹는 만큼만 가지고, 남는 것은 이웃과 나누라"고 가르쳤다. 탐욕은 인간을 병들게 하지만 나눔은 공동체를 살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크교의 랑가르 정신과도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시크교가 누구에게나 무료 식사를 제공하는 이유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함께 먹는 식탁에서 인간의 평등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우리 민족의 홍익인간 정신 역시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사명을 품고 있다. 대종교의 한(一)사상, 불교의 자비, 유교의 인(仁), 도교의 무위자연, 시크교의 봉사, 그리고 다석의 생명철학은 표현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인간과 공동체를 살리는 길을 향한다. 아시아의 영성이 위대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서로 다른 강물이 흘러 결국 하나의 바다를 이루듯, 종교와 사상은 달라도 인간을 사랑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목적은 하나이다.
시크교의 중심에는 살아 있는 스승으로 존경받는 《구루 그란트 사힙(Guru Granth Sahib)》이 있다. 이 경전은 제5대 구루인 구루 아르잔이 여러 구루들의 찬가와 성현들의 시를 모아 편찬한 《아디 그란트》를 바탕으로, 제10대 구루 구루 고빈드 싱이 최종적으로 완성하였다. 그는 "이제부터 인간 구루는 끝나고, 《구루 그란트 사힙》이 영원한 구루가 된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특정한 한 사람의 권위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를 공동체의 영원한 스승으로 삼겠다는 인류 종교사에서도 매우 독창적인 선언이었다.
《구루 그란트 사힙》에는 시크교 구루들의 찬가뿐 아니라 힌두교와 이슬람의 성인들이 남긴 시와 영성도 함께 담겨 있다. 진리는 어느 한 종교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는 구루 나낙의 사상이 경전 속에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시크교 사원에서는 지금도 이 경전을 살아 있는 스승처럼 모시며, 예배 때마다 낭송하고 공동체의 삶을 비추는 기준으로 삼는다.
《구루 그란트 사힙》은 인간에게 세 가지를 끊임없이 권면한다. 첫째, 창조주를 늘 기억하라. 둘째, 정직하게 노동하라. 셋째, 얻은 것을 이웃과 나누라. 놀라운 것은 이 가르침이 5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조금도 낡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AI와 디지털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더 깊은 양심이라는 점에서, 이 경전의 가르침은 더욱 큰 울림을 준다.
오늘날 AI는 인간보다 더 빠르게 계산하고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한다. 그러나 AI는 스스로 양심을 만들지 못한다. 인간이 어떤 가치를 입력하느냐에 따라 AI는 인류를 돕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인류를 위협하는 기술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AI 시대의 핵심 경쟁력은 기술만이 아니라 윤리이다. 기술을 이끄는 것은 결국 인간의 영성이다.
시크교는 우리에게 말한다. "기도한 만큼이 아니라 봉사한 만큼 신앙인이다." 다석은 말한다. "생각이 아니라 삶으로 진리를 증명하라." 홍익인간은 말한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세 목소리는 시대와 문화는 달라도 결국 하나의 진리를 향하고 있다.
인류는 앞으로도 더 강력한 AI를 만들 것이다. 더 뛰어난 로봇도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기술이라도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문명은 오래가지 못한다. 기술은 문명을 발전시키지만, 사랑과 봉사는 문명을 지속시킨다. 이것이 시크교가 500년 동안 자신의 역사로 증명해 온 진실이다.
아시아는 세계 종교의 발상지이다. 힌두교와 불교, 조로아스터교, 유교와 도교, 신토, 대종교, 그리고 시크교에 이르기까지 이 대륙은 수많은 영성의 꽃을 피워 왔다.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 속에서 태어났지만, 모두가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의 회복을 향해 걸어왔다.
그래서 시크교는 더 이상 인도만의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AI 시대가 다시 발견해야 할 인간학이며, 공동체를 살리는 문명의 철학이다. 칼보다 강한 것은 믿음이고, 믿음보다 강한 것은 사랑이며, 사랑보다 오래 남는 것은 봉사이다. 그리고 다석 유영모가 평생 찾았던 생명의 길 역시 바로 그 봉사와 사랑의 자리에서 완성된다.
이로써 시크교는 단순한 종교의 역사를 넘어, 아시아 영성이 인류의 미래에 던지는 하나의 답이 된다. 기술은 세상을 바꾸지만, 영성은 사람을 바꾼다. 사람을 바꾸는 문명만이 결국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이것이 시크교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이유이며, 오늘 우리 모두가 다시 귀 기울여야 할 아시아 영성의 메시지이다.
다석 유영모는 "진리는 하나요, 길은 여럿이다."라는 뜻의 사상을 평생 실천하였다. 시크교의 《구루 그란트 사힙》 역시 진리를 특정 종교 안에 가두지 않았다. 힌두와 이슬람의 성현들의 목소리까지 함께 품은 이 경전은, 참된 진리는 경계를 넘어 인간을 하나로 묶는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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