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정 칼럼] 칩은 짧고 예술은 길다

  • 김대중이 연 자유와 개방의 길… AI 시대에 이어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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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정 한미의회교류재단 이사장/전 국회의원] 


반도체의 수명은 성능표로 재지만 문화의 수명은 사람의 기억으로 잰다. 오늘 가장 빠른 칩도 몇 해 뒤면 다음 세대에 자리를 내준다. 그러나 수천년 전 호메로스의 이야기는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 〈오디세이〉로 다시 관객을 만났다. 낡은 기술은 대체되어도 인간의 사랑과 상실, 귀환에 대한 갈망은 영원하다. AI 시대에 대한민국이 물어야 할 질문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무엇을 더 잘 만들 것인가. 그리고 세계인의 마음에 무엇을 오래 남길 것인가.

반도체는 대한민국이 이룬 위대한 성취다. 경제와 안보를 지탱하고 AI 경쟁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반도체가 한국을 필요한 나라로 만든다면, 문화는 한국을 좋아하고 신뢰하는 나라로 만든다. 대한민국의 다음 성공전략은 기술과 문화를 두 축으로 세우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9월 7일 생폴드방스에서 공동 주재한 '뤼미에르 서밋'은 그 가능성을 보여줬다. 양국은 2027년부터 5년간 각각 5억 유로씩 모두 1조6000억원을 영화·영상산업에 투자하는 '뤼미에르 파트너십'을 선포하고, 작품의 다양성 수호와 불법복제 방지를 담은 '뤼미에르 선언'도 채택했다. 독립영화 지원과 AI 시대의 인간 중심 창작, 로컬 콘텐츠의 세계 진출도 함께 논의됐다. 문화의 미래를 정상외교의 중심에 둔 방향은 평가받아 마땅하다. 이제 투자액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 투자가 누구의 상상력을 키우고 어떤 창작 환경을 남길 것인가.

문화의 힘은 흥행 수입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 작품을 보고 생긴 관심은 음식과 관광, 패션과 한국어 학습으로 번진다. 무엇보다 낯선 나라를 친숙한 나라로 바꾸고, 그 나라 사람들의 고민과 희망을 이해하게 한다. 이렇게 쌓인 친숙함과 신뢰는 외교와 경제에도 힘이 된다. 문화정책을 단기 매출과 수출액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렇다면 세계는 왜 한국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나. 〈기생충〉의 반지하와 〈오징어 게임〉의 달고나는 지극히 한국적이다. 그 안에 담긴 불평등과 생존 경쟁은 세계인이 겪는 문제다. 방탄소년단은 한국어로 청년의 불안과 자존을 노래해 국경을 넘었다. 가장 지역적인 이야기가 가장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한류가 증명했다.

한류의 성공을 하나의 국민성이나 어느 한 정부의 공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역사와 전통, 전쟁과 분단, 압축성장의 상처와 열망이 작품에 스며 있다. 창작자의 집요함에 기업의 기획과 투자가 더해졌고, 대중은 작품을 선택했다. 해외 팬들은 자발적으로 번역하고 공유하며 유통의 경계를 허물었다. 한류는 한국이 만들고 세계인이 함께 키운 글로벌 공유 문화가 되었다.

그 성장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 조건은 무엇이었나. 바로 민주주의였다. 권위에 도전하고 사회의 어두운 얼굴까지 드러낼 자유가 이야기의 깊이를 만들었다. 빈부격차와 사회적 폭력, 청년의 좌절을 숨기지 않은 작품들이 오히려 한국을 더 깊이 이해하게 했다. 비판을 허용하는 사회라는 신뢰도 쌓였다. 표현의 자유는 문화의 장식이 아니다. 창작자의 상상력을 지키는 울타리이자 문화산업의 경쟁력이다.

김대중은 그 자유를 넓히고 개방을 정책으로 뒷받침했다. 외환위기로 나라가 휘청이던 때에도 문화를 21세기의 기간산업으로 보았다. 1999년 문화산업진흥기본법을 제정하고 영화진흥위원회를 출범시켰다. 2000년에는 문화예산이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정부 총예산의 1%를 넘었다. 나라가 어려울수록 당장의 생존을 넘어 다음 시대에 투자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김대중의 문화적 자신감을 잘 보여 준다. 당시에는 일본 문화가 밀려오면 우리 문화가 무너질 것이라는 걱정이 컸다. 김대중은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자기 것으로 바꾸어 온 한국인의 역량을 믿었다. 1998년 10월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이어 단계적 개방이 시작됐다. 빗장을 걸어 지키기보다 교류와 경쟁 속에서 더 강해지는 길을 택한 것이다. 우려는 빗나갔다. 오히려 한국 대중문화가 일본 시장을 넓혀 갔다. 개방은 종속이 아니라 도약의 계기가 됐다.

디지털 기반도 함께 넓어졌다. 초고속정보통신망 사업은 앞선 정부에서 시작됐지만 김대중 정부는 1998년 2단계 사업을 본격화하고 인터넷 보급을 빠르게 확장했다. 1999년 인터넷 이용자가 1000만명을 넘어섰고, 2002년에는 초고속인터넷에 가입한 가구가 1000만을 돌파했다. 그 위에서 게임과 디지털 콘텐츠가 성장했고, 대중이 온라인에서 작품을 만들고 평가하고 퍼뜨리는 문화도 커졌다. 문화정책과 정보화정책이 맞물리며 한류가 자랄 토양이 넓어진 것이다.

그 중심에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다. 나는 그 시기 김대중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했다. 2003년 춘사영화제에서 영화인들이 그에게 공로상을 드리던 날, 눈시울을 붉히던 김 대통령도 바로 곁에서 지켜봤다. 지금 돌아봐도 그의 큰 공은 성공할 작품을 고르는 대신 창작자가 자유롭게 도전할 조건을 넓힌 데 있다. 한류의 주인공은 언제나 창작자와 대중이다. 정부의 역할은 그들의 가능성을 믿고 실패를 견딜 바닥을 마련하는 데 있다.

AI는 이 원칙을 더 중요하게 만든다. AI는 영상과 음악 제작을 돕고 번역과 편집의 비용을 낮춘다. 작은 제작사와 신인 창작자도 이전에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표현을 시도할 수 있다. 언어의 장벽이 낮아지면 한국의 지역 이야기와 독립 작품이 세계 관객을 만날 가능성도 커진다. 제대로 쓰면 AI는 창작의 문을 넓히는 도구가 된다.

위험도 분명하다. 이미 존재하는 작품을 허락 없이 학습에 쓰고 창작자의 이름과 화풍과 목소리를 손쉽게 모방한다면, 기술의 이익은 플랫폼에 집중되고 창작자는 설 자리를 잃는다. 추천 알고리즘이 익숙한 흥행 공식만 반복해 보여 주면 문화의 다양성도 줄어든다. 빠르고 값싼 제작이 곧 좋은 문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삶을 담을지, 무엇을 질문할지, 표현의 결과를 어떻게 책임질지는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이재명 정부의 문화정책은 네 가지 조건을 세워야 한다. 첫째, 창작의 자유를 제도로 보장해야 한다. 정부에 불편한 작품이 지원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면 지원기관의 독립성과 심사의 투명성이 전제다. 정권과 가까운지가 아니라 작품의 독창성과 창작자의 역량을 기준으로 삼고, 선정 과정을 공개하며, 지원한 작품의 내용에는 손대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창작자가 눈치를 보지 않고 시대의 금기를 질문할 수 있다.

둘째, 독립영화와 기초예술, 청년과 지역 창작자가 실패하고도 다시 도전할 기반을 넓혀야 한다. 오늘은 낯설고 시장성이 작아 보이는 실험이 내일의 새로운 흐름이 된다.

셋째, 플랫폼과 제작사, 창작자 사이의 공정한 계약과 투명한 정산을 정착시켜야 한다. 산업의 매출이 늘어도 창작자의 삶이 메마르면 성공은 오래가지 못한다. 넷째, AI가 어떤 저작물을 학습과 생성에 이용했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하고, 권리자의 동의와 정당한 보상 원칙을 세워야 한다. 기술혁신과 저작권 보호를 양자택일로 몰아갈 이유는 없다. 예측 가능한 규칙이 있어야 창작자도 기술기업도 지속적으로 투자할 수 있다.

프랑스와의 협력도 공동제작과 인재 교류, 문화 다양성을 넓히는 성과로 이어져야 한다. 대규모 작품뿐 아니라 독립영화와 애니메이션, 지역 기반 콘텐츠가 서로의 시장을 만날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제작 역량과 프랑스의 문화정책 경험이 결합하면 세계 시장의 선택지를 넓히는 협력이 될 수 있다.

국가의 문화적 매력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자유로운 창작과 공정한 보상이 오래 쌓여야 세계가 신뢰하는 문화가 된다.

정부가 나서서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다음 이야기를 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만들 사람이 두려움 없이 말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할 수는 있다. 김대중이 연 자유와 개방의 길을 AI 시대에 더 넓혀야 한다. 가장 앞선 반도체와 가장 오래 남는 이야기를 함께 가진 나라. 칩의 수명은 몇 해지만,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이야기는 세대를 건너 수천년 이어진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더 큰 성공전략이다.


필자 주요 이력 

△한미의회교류재단 이사장(Korea Inter-Parliamentary Exchange Center, Washington DC) △전 국회의원 (재선, 경기 남양주을, 민주당) △2006~2007 코넬대학교 동아시아센터 방문연구원(New York, USA) △전 대통령(김대중) 비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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