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첫 남북비밀회담…7.4남북공동성명 성과
31일 노환으로 별세한 이후락(李厚洛.85) 전 중앙정보부장은 현대사의 암흑기인 '유신(維新) 시대'를 대표하는 풍운아였다.
지난 1924년 울산에서 태어난 이 전 부장은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해 1946년 3월 23일 1기로 임관했으며 1948년에는 육군 정보국 차장을 지냈다.
그는 5.16 군사정변에서 큰 공적으로 세우지는 못했지만 박정희에 의해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을 지내고,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되면서 권력의 핵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1969년 10월 박 전 대통령은 3선 개헌의 '후폭풍'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를 주일본 대사로 내보냈고,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도 해임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듬해인 1970년 12월 제6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면서 다시 권부 핵심으로 복귀했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총지휘, 명실상부한 '정권의 2인자'로 발돋움했다.
그는 중앙정보부장 재임 기간인 1972년 5월 '대북 밀사'로 평양에 파견돼 김일성 전 북한 주석과 사상 첫 남북비밀회담을 가졌고 '7.4 남북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당시 이 전 부장은 판문점을 경유, 3박4일간 비밀리에 평양에 머무르면서 2차례에 걸쳐 김 전 주석과 회담했다.
김 전 주석과 이 전 부장의 회동은 심야에 이뤄졌으며, 김 전 주석은 당시 "민족의 분열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갈라져 있던 동포끼리 이처럼 만나고 보니 반갑고 감개무량하다"면서 조국통일 3대 원칙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담 5개월여 뒤인 1972년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됐다.
이 전 부장은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중앙정보부를 통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국민들에게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지탄받기도 했다.
특히 1972년 10월 유신 체제를 확립하고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하는 등 역사의 고비고비 마다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실제로 지난 1998년 6월8일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는 홈페이지에서 '1973년도 비밀 외교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이 전 부장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유신 실세로 입지를 굳혔던 이후락은 1973년 12월1일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이 '박정희의 후계자는 이후락이다"라고 말한 이른바 윤필용 사건에 의해 3년간 지켜온 중앙정보부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이후락은 잠시 정계를 떠나 있다가 1979년 민주공화당의 유정회 의원이 됐지만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암살되자 정계를 떠나 지금껏 경기 하남에서 도자기를 구으며 칩거했다.
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권력자였지만 말년은 불우했다. 2004년 부인이 당뇨 등 지병으로 별세한 뒤에는 노인성 질환을 앓기 시작해 최근에는 지인들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방 밖으로 거동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됐었다고 한다.
이씨 소유의 경기 하남시 자택과 땅은 보험회사 대출금을 갚지 못해 1999년 8월 경매돼 다른 사람의 명의로 넘어갔고, 앞서 경기 광주에 있던 도자기 요장과 땅도 1994년 매각됐다.
아주경제= 인터넷뉴스팀 기자 news@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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