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룡, '왕따'에서 '주류세력'으로 자리매김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은 1964년 제주도에서 가난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했던 그는 리어카 바퀴에 발가락이 끼어 거의 잘릴뻔한 사고를 당해도 변변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발가락 두개가 위를 향해 뒤틀리는 기형이 돼 버렸고 아직도 2개의 발가락은 기형적으로 위를 향하고 있다.

원 의원은 가난한 집안의 사정속에서도 1982년 '학력고사 전국수석'으로 서울대 법대를 들어갔다. 그러나 어린 시절 그는 빼어나게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공부보다는 각종 책에 둘러싸여 독서에 열중하는 편이었다. 초등학교 때 서점을 하다 망한 부모님이 집안에 들여놓은 책을 다 읽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고등학교 입학한 이후 공부에 열중했으며 특유의 강한의지로 공부를 했다고 한다.

대학에 입학 한 그는 당시 어지러웠던 현실을 마주하게 됐다. 서울대 광장에서 열린 집회를 보고 학생운동에 동참할 것을 결심한다.

이후 지하서클 '사회복지연구회'에 들어갔고, 시위로 경찰서에 끌려가 6개월간 유기정학을 받았다. 또 구로공단에서 야학생활을 하기도 했고, 인천에 있는 한 금속공장에 위장취업을 하기도 했다.

그의 운동권 경력은 1989년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함께 끝이 났다. 이후 그는 사법고시 준비를 결심했으며, 시험준비 2년만인 92년 수석으로 합격했다. 당시 그가 시험을 준비하며 정리한 '원희룡 노트'는 아직도 후배들의 손에 손을 타고 전해진다고 한다.

이후 서울지검과 수원지검·부산지검 등에서의 4년여 검사생활과 2년여 변호사 생활을 거쳤다.

그리고 2000년 16대 총선 직전 당시 거센 '젊은피' 수혈 바람을 타고 곧바로 정계에 입문한다.

정계 진출 이후 한나라당의 '젊은 피'로 보수개혁을 몸소 실천했다. 그는 김부겸, 김영춘 등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과 소장파 모임인 미래연대를 만들어 당 개혁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 과정에서 '탈당 1순위', '열린우리당의 간첩' 등 당 안팎의 거센 비난에 직면했고, 공공연한 '당내 왕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원 의원은 당내 비난 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개혁의지를 접지 않았다. 그는 17대와 18대 국회를 통해 성장했고 당내 '주류'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원 의원은 이제 당의 지속적인 변화를 이끄는 '리더'로서 당의 큰 축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주경제= 팽재용 기자 paengme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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