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드화 한달새 10% 급락…실직자 1년새 60% 늘어

  • 현장르포-우려로 새해 맞은 영국<BR>환율효과 노린 관광객만<BR>건물임대·재고정리 간판 넘쳐

#1. 지난해 12월 28일 영국 런던 지하철 나이츠브리지(Knights Bridge) 역. 시침은 이제 막 오후 4시를 넘어가고 있었지만 거리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인파에 휩쓸려 다다른 곳은 영국 대표 백화점 해롯(Harrods). 명성만큼이나 현란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건물 전체를 휘감고 있다. 쇼핑객들로 발디딜 틈 없는 백화점 입구에서 유럽발 금융위기 조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2. 다음날 오전 10시 뱅크(Bank) 역 1번 출구. 런던 금융가 시티오브런던(City of London)의 심장부답게 옛 증권거래소인 로열익스체인지(Royal Exchange)와 영란은행(BOE)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시티 최고층 빌딩인 '타워42' 인근에서는 수많은 타워크레인이 새로운 랜드마크를 쌓아 올리고 있었다. 새해 세계 경제의 위험 변수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고 있는 유럽발 금융위기설은 기우에 불과했던 것일까.

◇파운드화 추락…"외국인만 신나"
백화점 안의 사정은 입구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기념품과 초콜릿 등 비교적 저렴한 선물을 장만할 수 있는 매장과 식품 코너가 자리한 1층은 북새통이었지만 명품 브랜드 매장이 들어선 윗층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그나마도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게 관광객이 대부분이다. 파운드화 가치가 떨어지자 환율효과를 노리고 원정 쇼핑온 이들이다. 현지인들은 "관광객들만 신났다"고 푸념했다.

실제로 유로화 대비 파운드화 가치는 12월 한달 새 10% 이상 떨어지는 등 지난해 25% 가까이 추락했다. 영국 경제경영연구소(CEBR)는 최근 영국 정부의 재정적자가 누적돼 파운드화와 유로화의 가치가 역전될 날이 머지 않았다고 경고했다. 올해 영국의 재정적자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13%를 웃돌게 될 전망이다.

3층 가전제품 매장 입구에 진열된 세탁기와 대형 냉장고는 아예 '재고정리(Clearance)'라는 딱지를 붙인 채 몸값을 절반 가까이 낮췄다. 명품 백화점으로 유명한 해롯이지만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재고정리' 문구에서는 소비부진에 따른 피로감이 묻어났다.

   
 
지난해 12월 26일 '복싱데이'를 맞아 런던 명품 쇼핑가 뉴본드스트리트를 찾은 쇼핑객들은 대개 중국인들이었다.

26일 백화점 등이 대대적인 할인행사에 나섰던 복싱데이(Boxing Day). 중저가 매장이 늘어선 옥스퍼드스트리트(Oxford Street)나 초고가 땅값을 자랑하는 명품 쇼핑가 뉴본드스트리트(New Bond Street)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던 크리스마스를 보낸 이들이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서울의 명동격인 옥스퍼드스트리트는 현지인과 관광객이 보기 좋게 뒤섞여 있었지만 뉴본드스트리트의 명품 매장은 대개 중국인들이 점령했다. 쇼핑객들이 줄지어 서 있는 프라다 매장 점원은 "손님 중 70~80%가 중국인"이라고 전했다.

김명수 코트라 런던 코리아비즈니스센터(KBC) 부센터장은 "영국 경제의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현지인들의 투자와 소비가 갈수록 위축되면서 영국 경제의 외부 의존도가 커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영국의 실직자 수는 2008년 10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62.8% 늘었다. 독일(7.6%), 프랑스(25.0%)는 물론 미국(53.6%)보다도 상황이 심각하다. 고용불안에 따른 민간소비 부진은 기업 실적 악화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실직사태를 유발하는 악순환을 불러왔다. 시내 중심가와 변두리를 막론하고 빌딩 창가에 내걸린 수많은 '건물임대(To Let)' 표지판은 영국 경제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시티-카나리워프 금융 주도권 경쟁
"금융허브가 어디 가겠습니까. 영국의 국가 부채가 엄청나다고 하지만 이 곳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박물관에 있는 유물 몇 점 정리하면 문제될 게 없다고 말합니다."

뱅크에서 만난 현지 금융인들의 말처럼 증권거래소로 쓰였던 로열익스체인지에 들어찬 고급 레스토랑과 명품 브랜드 매장은 성업 중이었다. 시내 다른 곳보다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싼 레스토랑에는 오전인데도 빈 자리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근처 빌딩에 나붙어 있는 '건물임대' 표지와 대조를 이뤘다.

김계환 산업은행 런던지점 차장은 "로열익스체인지의 분위기를 통해 경기를 가늠하곤 하는데 두바이나 그리스 쇼크 이후에도 이 곳의 풍경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말 두바이 정부는 국영 부동산개발업체 두바이월드의 채무상환 유예(모라토리엄)를 선언했다. 채무 규모는 590억 달러로 두바이 전체 부채 800억 달러의 74%에 해당한다. 금융권에서는 이 가운데 영국 자본이 20~25%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40%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돼 영국발 금융위기 우려를 자아냈다.

   
 
 
그러나 템즈강가의 카나리워프(Canary Wharf)로 런던 금융중심가 위상을 넘겨 준 시티는 옛 영광을 되찾으려는 듯 긴장감 속에 활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빅토리아풍 낮은 건물들 사이로 치솟아 오른 타워크레인이다.

헤지펀드 매니저 매튜 모리스는 "여간해서는 건축허가가 나지 않는 시티지만 곳곳에서 크레인이 올라가고 있다"며 "지난해 금융위기는 물론 최근 두바이 충격 속에서도 공사가 중단되거나 취소된 사례는 없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건물이 시티 최고층 빌딩인 '타워42' 옆에 짓고 있는 '비숍게이트타워'. 이 건물은 아직 뼈대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타워42를 압도하는 시티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전망이다.

금융위기의 한가운데서도 시티가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데는 세계 최대 금융중심지로서의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자존심이 크게 작용했다.

김 차장은 "영국 정부가 금융감독청(FSA)을 이전하는 등 카나리워프에 힘을 실어주는 동안 소외받았던 시티가 카나리워프와 경쟁에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위기일수록 금융중심지라는 상징성이 차지하는 힘이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벌어지는 금융산업 주도권 경쟁은 국가적으로도 이익이다. 터 닦아 놓은 금융허브가 한 순간에 사라질 리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북미와 유럽 대륙을 연결하는 런던은 오랫동안 금융허브 역할을 해왔다. 그 결과 영국은 직접적인 금융산업은 물론 법률과 회계 등 관련 산업에서 막대한 수입을 거둬 GDP에서 금융산업이 담당하는 몫이 20%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영국 정부가 어떻게든 런던의 금융허브 위상을 지켜내려 할 것으로 보고 있다. 런던에 진출했다 금융위기 이후 철수한 국내외 대형 금융기업은 아직 단 한 곳도 없다.

런던=김신회 기자 raskol@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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