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에 고향인 경상남도 창녕 남지를 떠나 대구로 이사를 갔던 홍 대표는 일 년 만에 ‘야반도주’ 하듯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홍 대표는 그의 자서전인 ‘변방'에서 ‘이 년만에 고향의 전답을 다 팔아먹고’ 고향으로 내려갔던 때를 부끄러웠다고 회상했다.
학창시절 도시락을 쌀 만한 형편이 되지 않아 물로 배를 채워야만 했던 기억도 있다.
홍 대표는 “점심시간이면 우물가에서 물로 배를 채우고 학교 뒷산에 늘 올라갔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교실로 들어오면 반찬 냄새와 밥 냄새 때문에 배고픔의 고통이 더 심했다.”고 말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장마와 가뭄이라는 자연재해도 그에게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낙동강과 가야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터를 잡고 살던 시절, 홍 대표가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학비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심었던 땅콩은 극심한 가뭄에 이어 45일 동안 내렸던 장마로 물에 잠겨버렸다.
당시 홍 대표는 “내 가족의 꿈은 그해 장마로 사라져 버렸고, 그날 밤 가야강 둑이 무너지면서 우리 집도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고 기억했다.
그러한 학창시절을 보냈던 그가 ‘검사’라는 꿈을 가지게 된 계기는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잡혀간 일이었다.
당초 아버지의 말대로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려 했던 그는 농협에서 배급을 받던 그의 아버지가 당시 농협조합장의 부정을 숨기기 위해 누명을 쓴 사실을 회상하며 “군인보다 검사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대표 당선 수락 연설에서 “달비(가발을 만들기 위한 부녀자나 처녀들의 머리카락) 장사를 하던 어머니와 일당 800원을 받고 조선소 앞 철근 조각을 지키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고 어린날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중심에 섰지만 치열했던 ‘변방정신’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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