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박 명예회장(84세)은 군인이자 정치인, 기업인을 “짧은 인생 영원 조국에”라는 말을 신조로 삶을 살았다.
대한민국 철강인 이었던 박태준은 대한민국 근대화 역사에서 포스코의 전신인 포항제철을 세워 산업입국에 기여한 한국의 철강왕 또는 한국의 ‘카네기’로 유명하다.
박태준은 일제 강점기인 1927년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임량리에서 박봉관씨와 김소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준(泰俊)은 크게 잘 되라는 뜻이다.
박 명예회장의 부모는 태몽으로 달음산타는 산)이 옹트림하는 꿈을 꾸고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풍수지리가로 유명한 5대조가 큰 인물을 얻으려면 달음산에 터를 잡아야 하다는 유언에 따라 태어났다고 한다.
박태준은 만 6세에 어머니와 일본으로 건너가 해방 직전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2년간 다니다 해방을 맞이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경비사관학교 6기생으로 입학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박태준은 무공훈장을 3개나 받으며 앞으로 인생을 살아갈 큰 신념을 갖게 된다. 그의 평생을 내내 함께했던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절대적 절망은 없다‘는 신념이다.
전후 수습에 여념 없던 54년 박태준은 평생의 반려를 만났다. 이화여대 정외과를 졸업한 24살의 정옥자씨와 맞선을 본 것이다.
정 여사는 당시 전도 유망한 박태준에게 최호준 교수의 ’경제학 원론‘을 선물했다고 한다. 경제인 박태준이 생애 처음으로 경제학과 만난 셈이다.
이후 박태준은 5·16 군사쿠테타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지만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쿠테타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쿠데타 전날 가족을 맡길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또 쿠테타 이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입안에 참여했다.
박 명예회장은 군 예편 후에는 경제인으로 변신해 1964년 대한중석(현 대구텍) 사장으로 임명되며 1년만에 대한중석을 흑자기업으로 바꾸었다.
68년에는 포항제철의 초대 사장이 되여 10년만에 연 550만톤의 철강을 생산하는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일본 미쓰비시 종합연구소는 1991년 포항제철 성공의 첫번째 원인으로 “모험사업 추진의 리더로서 지도력, 통찰역, 사명감을 충분히 발휘한 박태준 회장의 공헌”을 뽑았다.
또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과 서울대가 공동으로 연구한 1992년 ‘포철의 경영 성공 사례’에서도 “박태준 회장의 탁월한 리더십”을 포스코 성공의 주 요인으로꼽고 있다.
박태준은 포철을 창업 25년이란 짧은 기간에 세계 굴지의 철강업체로 키운 한국철강업계의 명실상부한 대부이자 세계철강업계의 거목으로 자랐다.
그러나 설립 당시부터 정치 외풍으로부터 포철을 지키는 울타리 역할을 해 온 그는 김영삼 정부와 불화로 결국 정권 수립 직전에 회장직을 내놨다.
92년 10월 5일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은 사퇴서를 제출했다. 박 명예회장은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직을 거절하고 백의종군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포철은 긴급이사회를 소집해 박 회장의 사퇴번의를 촉구키로 결의하기도 하였다.
박태준은 김영삼 집권 이후 포철 협력사들로부터 39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한동안 외국을 떠돌기도 했다.
97년에는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총재가 되었고 김종필과 함께 김대중의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선을 지원하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에 국무총리했지만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으로 4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장옥자씨와 진아·유아·근아·경아·성빈씨 등이 있다.
한편, 포스코측과 유족들은 고인의 뜻을 받들어 장례 절차에 대하여 비교적 검소하게 진행하는 것 등을 논의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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