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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묘앞 작은 기념관을 지어 주유를 기리고 있다 |
기념관의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그림으로 남겨진 주유의 일대기였다. 이들 그림 가운데 유독 몇점이 우리 취재팀의 눈길을 끌었다.
주유가 서성(舒城, 지금의 안휘성 소속)에 살때, 손책의 집과 이웃하며, 서로 왕래했다고 한다. 때문에 같은 나이인 두 사람은 자연스레 친분이 두터워질 수 밖에 없었다. 주유묘에는 이들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그림으로 남아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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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가 손권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내라고 하지만 주유는 이를 적극 반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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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대표적인 전투 '적벽대전'의 석각 그림을 통해 주유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
건안 7년, 조조는 손권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내라고 압박했다. 하지만 손권은 아들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대신들이 망설이고 있을 때 오로지 주유만이 손권의 모친 앞에서 인질을 보내지 말아야한다고 반대했다. 손권의 모친은 “공근(주유)의 말이 옳다. 공근은 백부(손책)와 같은 나이이고 친구사이이다. 나는 공근을 아들처럼 여기니, 너도 형처럼 모셔라”고 했다. 이들의 이야기로 볼때, 주유는 동오에 대해 정치적으로 충성을 다했을 뿐 아니라, 윤리상으로도 손씨 집안과 매우 가까웠음을 알 수 있었다.
주유의 일대기 중 가장 화려한 전투 중 하나가 바로 적벽대전이다. 주유에 대해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삼국지 전투'의 하이라이트인 적벽대전이다. 삼국의 정립에 크게 영향을 준 전투가 바로 적벽대전이기 때문이다. 적벽의 전투는 화북의 원소를 제압한 조조가 형주를 차지하고 강동지역으로 들어간 유비를 쫒는 과정에서 발생한 전투다. 손권·유비 연합군은 조조의 대군을 맞이해 크게 승리했고 그 정점에 바로 주유가 서 있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주유가 제갈량을 시기했다는 표현이 나오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적벽대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실제 삼국지에서는 주유가 조조를 맞아 화공법을 이용해 맞서 싸워 이긴 전쟁으로 적고 있다.
주유가 근래에 더 조명받는 이유는 바로 천하이분지계 때문이다. 주유는 적벽대전이 끝난 후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가 아닌 천하이분지계를 꿈꾼다. 적벽에서 크게 대패한 조조가 재정비의 시간이 오래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또한 유비가 기반 거점이 없었기에 적당히 견제한다면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유는 천하이분지계라는 계획을 세웠다. 북쪽은 조조가 남쪽은 손권이 나눈다는 전략으로 나중에는 마초와 손을 잡고 조조를 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주유는 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요절했다. 적벽대전 이후 오나라가 남군성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에 주유가 출전했다. 조조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조인을 남군태수로 파견해 남군에서 강을 끼고 농성전으로 대항했다. 이 과정에서 감녕이 포위되면서 결국 주유는 능통에게 군사를 맞기고 여몽과 감녕을 구출해 낸다. 이후 주유는 조인과의 결전을 앞두고 지휘 중 옆구리에 화살을 맞아 심하게 부상을 당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일찍 요절하고 만 것이다.
만약 주유가 20년을 더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유비가 자리를 잡고 한 나라를 일으키기에는 주유의 견제가 심했을 것이다. 조조 또한 주유의 천하이분지계로 삼국통일의 꿈을 이루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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