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지난 1994년 김일정 주석이 사망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조의를 표했다. “주민들에게 위로를 전한다”는 말로 돌려 말했지만, 조의는 분명 조의다. 일각에서는 사자에 대한 한마디 없는 조의가 무성의하게 느껴진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마국은 그러나 대북 관계에서 그동안 가장 첨예한 대립점이 됐던 북한의 핵개발 문제나 인권문제, 남한에 대한 빈번한 도발 등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말을 최대한 아끼고 있다. 매우 신중하면서도 실리적인 대처다.
이같은 입장에서 미국 국무부는 “북한 새 지도부가 국가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고,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주민들의 권리를 인정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를 다시 종합해보면 미국은 그동안 대립해 왔던 김정일이 사라지고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지금까지 취해왔던 입장에서 크게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적대국이지만 ‘국상’을 당했으므로 자극하지 말되 할 말은 하자는 입장 정리다.
중국도 걸림돌이다. 북한의 유일한 강대국 우방인 중국의 후 진타오 총리가 나서 김정일 사망에 대해 조의를 표하는 마당에 중국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 일단 조의 정국이 끝나면 중국을 비롯한 러시아, 일본 등과 함께 향후 북한 문제를 실천적으로 협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북한의 권력을 누가 승계할 것인가 하는 점을 판단하는 일이다. 김정일의 삼남 김정은이 예정대로 승계할 것이라고는 알고 있지만, 김정일이 예상보다 빨리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또 다른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이에 따른 모든 복잡한 발생 가능 시나리오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대책을 마련하고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 평화적 권력 승계를 원한다고 미국은 바라고 나섰다.
이러기 위해서는 일단 북한을 관찰하고 있어야 한다. 김정일 사망 직후 백악관에서 나온 입장은 “당장 중대한 새 사건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예의주시하고 있겠다”였다. 북한을 상대로 요구할 게 있어도 누가 실제 권력을 잡을 것인지가 지금으로서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딜레마다.
워싱턴 내부적으로는 내년 선거가 작용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가장 강조했던 공약 중 하나가 평화다. 이라크 전쟁은 명분이 없고 미국 젊은이들의 목숨과 납세자의 돈을 희생시켰으니 끝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달 미군은 드디어 완전히 철수했다. 북한을 향해서도 조만간 식량을 지원할 예정이었고, 북한의 핵 개발을 결국 막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의 면모를 재선가도에 끌고 가겠다는 구상이었지만, 당장 이도저도 할 수 없게 됐다. 미국이 김정일 사망에 대해 매우 신중하게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아주경제 송지영 기자)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