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펑은 1951년9월 쓰촨성의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문화대혁명이 종료된 1977년 26세의 나이로 시안(西安)교통대학에 들어가 공정역학을 전공했으며 이어 충칭(重慶)대학에서 기계공정과 석사학위를 밟았다. 1982년 석사를 취득한 후 그는 충칭대에 남아 역학데이터실에서 연구작업을 진행했다. 부주임까지 올라선 그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 많은 대학생들을 이끌었다. 능력을 인정받은 류펑은 1985년 공청단 충칭시 서기로 발탁된다. 그리고 1987년에는 공청단 쓰촨성 서기에 올라선다. 4년여 쓰촨성 공청단을 이끈 그는 1991년 스촨성 이빈(宜賓)시 부서기로 전임되며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1993년 공청단 중앙으로 불려올려지며 베이징에 입성하게 된다. 그는 1997년까지 공청단 중앙에서 서기처 서기를 지냈다. 당시 공청단 제1서기가 현재 상무부총리인 리커창(李克强)이었다. 리커창과 함께 5년동안 손발을 맞춰왔기 때문에 리커창의 최측근 인사로 분류되기도 한다. 때문에 리커창이 2013년 3월 총리에 올라선다면 리펑을 중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1997년 공청단을 나온 그는 5년동안 중앙선전부 부부장으로 일하게 된다. 2002년에는 고향인 쓰촨성의 부서기로 승진배치됐으며 2년후인 2004년 53세의 나이에 장관급인 국가체육총국 국장이 됐다. 베이징올림픽을 앞둔 시점에서 국가체육총국 국장에 오른 것은 류펑에 대한 공산당의 신임이 두터움을 방증하는 것이며, 류펑 스스로의 인생에 있어서도 절호의 기회였다.
류펑의 발탁은 2001년 중국공산당 창당 80주년 기념행사가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공산당의 3대 핵심부서인 조직부, 선전부, 통일전선부가 협력하여 행사를 기획했으며 선전부 부부장이던 그는 지도자 전시소조 조장이었다. 최고지도부로부터 가장 큰 호평을 받은 것이 그가 주관한 지도자 전시회였다. 2004년 후진타오 주석이 쓰촨성 부서기로 있던 류펑을 불러 올린 것은 그가 공청단 경력이 있는데다 대형 행사에서 선전부 간부로서 발군의 능력을 발휘한 점 때문이었다. 당시 인사에 대해 해외매체들은 “중국 공산당이 올림픽을 선전도구로 활용하려 한다”는 평가를 내렸었다.
류펑은 2005년 초 올림픽에서 대만인 자원봉사자를 적극 활용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으며 그해 직접 대만을 방문, 성화봉송의 대만 통과와 일부 종목의 대만 분산개최를 추진할 뜻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분산개최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가 올림픽을 양안통합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 고심을 거듭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2006년 초 베이징 올림픽 조직위가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을 개폐회식 총감독으로 위촉한 것도 류펑의 작품이다. 그리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중화민족’을 주제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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