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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을 모신 무후사. 총 세 채로 이루어진 건물 중 첫 번째 전각이다. 바닥에서 떨어져 있는 전면의 4개 기둥은 제갈량이 이미 하늘의 뜻과 땅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의미다. |
八九年間始欲裏 (8, 9년에 기울기 시작하고)
至十三年無孑遺 (13년에 이르면 아무것도 남지않네)
到頭天命有所歸 (마침내 천명이 돌아가니)
泥中蟠龍向天飛 (흙탕 속에 있던 용은 하늘로 치솟으리)
샹양(襄陽)은 제갈량의 고장이다. 삼국지에는 유비, 관우, 장비를 비롯한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나오지만, 실제 주인공은 제갈량(諸葛亮)인지도 모른다. 제갈량의 등장도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한다. 제갈량의 자는 공명(孔明)이고 호는 와룡(臥龍)이다. 유비를 만나기 전에는 와룡으로 불렸지만, 그 후 공명으로 더 많이 불린다.
일부에서는 이미 천문을 깨우친 제갈량이 유비의 미래를 알고 더 큰 인물을 만나기 위해 두 번이나 퇴짜를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세 번씩이나 찾아온 유비의 정성에 결국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는 해석도 있다.
최근 들어 제갈량은 병법의 천재뿐만 아니라 21세기형 리더십으로도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그가 평생을 지킨 공평(公評), 공정(公正), 공개(公開) '3공(三公) 정책'은 현대의 CEO들에게 좋은 지침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2인자로 신의를 다한 제갈량의 일관된 삶은 약삭빠른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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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중국가중점평가명승구'라는 입구를 지나면 처음 만나는 석조물. 전면 중앙의 붉은 글씨 ‘고융중’ 양옆으로 제갈량이 후손들을 위해 남긴 ‘명정지원’과 ‘담백명지’라는 글귀가 보인다. |
융중국가중점평가명승구(隆中國家重點評價名勝區)라고 쓰여 있는 입구를 지나면 ‘고융중(古隆中)’이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 석조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융중산은 해발 306m로 이 부근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다.
고융중이라는 현판을 중심으로 좌우에 제갈량이 후손들을 위해 남긴 마음을 다해 공부하라는 명정지원(甯精致遠)과 마음을 비워야 원대한 꿈을 가질 수 있고 마음이 안정돼야 꿈을 펼칠 수 있다는 담백명지(擔泊明志)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석조물 뒤편에는 삼대하일인(三代下一人)이라는 찬사의 문구가 나온다. 이 글은 당대의 유명한 시인 소동파의 글로 하(夏), 상(商), 주(周)나라 3대의 흥망을 거치며 태어난 역대 최고의 천재라는 뜻이다. 양 옆으로는 제갈량이 지혜는 물론이고 군사적으로도 뛰어나다는 두보의 시가 새겨져 있다.
조금 더 지나면 궁경용무(躬耕隴畝)라고 쓴 비석이 나온다. 이곳은 제갈량의 채소밭이었다고 한다. 글씨는 2002년 8월 중국 공산당 군사위원회 류화칭(劉華淸)부주석이 썼다고 한다. 지금은 관광객들을 위한 정원으로 조성돼 있다.
오른쪽으로 산자락을 타고 오르면 조그만 돌다리 소홍교(小紅橋)가 나온다. 유비가 제갈량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이곳에서 제갈량의 장인을 보고 제갈량으로 착각해 넙죽 큰절을 올렸다고 한다. 원래는 나무로 만든 다리였으나 후대에 돌로 만들어 보존하고 있다.
소홍교를 지나면 돌계단을 따라 유비가 은거중인 제갈량을 찾아왔던 삼고로(三顧路)가 쭉 이어진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누각은 포슬정(抱膝停)이다. 끌어안을 포(抱)에 무릎 슬(膝), 이름 그대로 혈기왕성한 제갈량이 무릎을 끌어안고 미래에 대한 포부를 노래했던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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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 모양의 기단 위에 세워진 초려 비석. 제갈량의 처소를 표시하는 비석으로 높이가 4m에 이른다. 거북의 머리를 만지면 고민이 없어지고, 몸통을 만지면 재물이 들어오고, 꼬리를 만지면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해 그 부분만 반질반질하다. |
실제 제갈량의 초가가 있던 곳은 아니지만 후세사람들이 초가를 짓고 기념했던 곳이다. 글자는 명나라 가경(嘉慶)황제 때 강회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 400년이 조금 지났다.
비석을 뒤로 하고 다시 계단을 오르면 제갈량을 모신 무후사(武侯祠)가 나온다. 무후사는 총 3채의 전각으로 구성돼 있다. 제갈묘(사당)는 중국 전역에 48채나 있는데, 이곳이 두 번째로 큰 규모다. 1000년 전부터 후손들에 의해 관리돼 왔으나 1966년 다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해 보존하고 있다.
한제갈승상무후사(漢諸葛丞相武侯祠)라고 쓴 첫 번째 전각의 전면 벽에는 지붕과 땅 사이에 떠 있는 4개의 기둥이 있다. 이 기둥은 제갈량이 하늘의 뜻과 땅의 조화를 이미 깨쳤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안에는 제갈량의 동상이 있다. 이동상은 중국에서 유일한 실물 그대로의 모습으로 1981년 후손들이 398kg의 동(銅)을 들여 제작한 것이다. 제갈량의 손은 행운을, 부채 백우선(白羽扇)은 지혜를 준다는 현지인들의 믿음에 광택이 난다.
삼고유지(三顧有志)라고 쓴 두 번째 전각에는 중국 유명 역사학자인 궈모뤄가 제갈량의 출사표를 보며 나라를 바로세우겠다는 의지를 담은 시가 남아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전각을 연결하는 과전에는 양옆으로 동상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이 동상들은 제갈량과 운명을 함께했던 인물들로 왼편으로는 방추와 흰 눈썹으로 유명한 마량 등 6명의 문신이 있다. 오른편에는 문무를 겸비한 료하와 향형 등 6명의 무신이 도열해 있다.
제갈무후(諸葛武侯)라는 현판의 세 번째 전각에는 제갈량을 중심으로 3대가 모셔져 있다. 사실 제갈량의 가족사는 파란만장했다. 181년 산동성에서 태어난 제갈량은 세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여덟 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삼촌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17세부터 10년간 이곳 융중에서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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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후사에 모셔진 제갈량의 실물 모습 동상. 1981년 후손들이 398kg의 동을 모아 제작한 것이다. 제갈량의 손은 행운을 부체는 지혜를 준다고 전해진다. |
세 번째 전각 옆으로 제갈량의 부인 황월영(黃月英)을 모신 전각이 있다. 삼국지속 제갈량의 부인은 대표적인 추녀로 나오지만 실제는 상당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장인이 될 황승언은 제갈량에게 “내게 빨간 머리에 검은 살결의 추한 딸이 있으니, 재능이 있는 자네와 잘 어울린다”며 혼사를 진행했다.
제갈량이 미모를 선택할지 재능을 선택할지 시험해 본 이야기가 추녀로 각색됐다. 이곳 사람들 사이에는 지금도 ‘공명의 신부 고르기를 흉내내지 마라’는 우스갯소리가 남아있다. 실제 못생긴 사람은 장인인 황승언이라고 한다.
제갈량과 운명을 같이 한 유비와 관우, 장비를 모신 삼의전(三儀展) 앞에는 검게 퇴색한 비석이 남아 있다. 장제쓰가 이곳을 건설하기위해 거금을 기부한 것을 기념한 비다. 문화대혁명 당시 파손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이 비석을 땅에 거꾸로 묻어 밟고 다니게 해 지금까지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무후사를 나오면 오른쪽으로 초가가 나온다. 이 초가는 1984년 이곳 방송국의 드라마 촬영 현장을 보존해 놓은 곳으로 실제보다는 좀 더 크고 화려하게 지어졌다. 중앙의 객실과 사랑채, 그리고 동생 제갈천의 숙소로 이루어져 있다. 뒤편에는 제갈량과 부인의 숙소가 있지만, 지금은 공사 중이라 볼 수가 없다고 한다. 마당에는 당시 제갈량이 타던 마차가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해 놓았다.
초가를 내려오면 유비와 제갈량의 삼고초려 현장인 삼고당(三顧堂)이 나온다. 1719년 청나라 시대에 조성된 곳으로 양쪽 벽에는 제갈량의 출사표와 유비와의 대화 등을 적어 놓은 글로 장식돼 있다. 정문 옆 세 그루 나무는 당시 유비, 관우, 장비가 말을 묶어 놓았던 곳을 기념해 후대에 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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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실제 초가 터에 세워진 주견숙 묘비. 명나라 왕손인 주견숙이 이곳을 길지로 여겨 자신의 무덤으로 조성했지만 현재는 흙무더기만 남아있다. |
이곳이 제갈량의 실제 초가터 였던 곳으로 판단하는 과학적 근거는 우물이다. 갈정(渴井)으로 불리던 우물은 현재 육각정으로 조성돼 있다. 당시 우물은 집뒤에 파면 자손이 없고 집앞에 파야 전도가 양양하다고 믿었다. 또한 좌대우소(左大右小), 왼쪽은 크고 오른쪽은 작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우물을 기준으로 보면 주견숙묘라는 비석이 있는 곳이 실제 제갈량의 초가가 있었던 곳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2800년의 역사 샹양고성
샹양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샹양고성(襄陽古城)이다.
한강을 마주보고 있는 북쪽에 3개의 성문이 자리 잡고 있고, 나머지 세 방향으로 성문이 하나씩 있다. 특히 이 세 방향에는 적의 침공을 막기위한 목적으로 해자를 건설해 놓았다. 최대 250m 넓이에 평균 180m다. 현존하는 중국의 고성중에서도 가장 넓은 규모로 지금은 옛 모습을 살려 시민공원으로 새롭게 조성해 놓았다.
28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샹양고성은 삼국시대 당시 유표의 근거지였다. 군사적 요충지로 20여 차례나 전란을 치른 곳이다. 둘레만 7km가 넘는다. 현재의 건물은 명청시대 양식이다. 북쪽의 임한문(林漢門)이 가장 완벽하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지금도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 성 내부에는 민가는 물론이고 현대와 전통을 조화시킨 상가들이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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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샹양고성. 명청시대 건축양식으로 가장 완벽에 가까운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임한문의 야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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