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타고 수십 여분을 달려가니 저 멀리 무성하게도 우거진 푸른 나무숲과 겹겹이 쌓인 들쭉날쭉한 모양의 기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는 자욱한 안개 속에 가려있던 푸른 수면이 끝도 없이 펼쳐지며 여행에 지친 취재팀의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차는 저수지 입구에 멈춰 섰고 취재팀은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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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석문댐 수면은 잔잔하고 고요한 모습이었다. |
“지금은 겨울이라 이 곳의 매력을 100% 느낄 수 없어요. 여름철이면 지금보다 몇 배는 푸르고 곱죠. 우기 때는 안개가 짙어지며 마치 그림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몽환적인 분위기가 극에 달해요. 수문이 열리고 물이 빠질 때면 물 거품이 흩날리면서 그야말로 장관입니다.” 안내원의 극찬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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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사잔도의 일부분인 잔도로 들어가는 입구의 모습. |
전국시기 처음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포사(褒斜)잔도는 당시 중원에서 촉(蜀)으로 들어가는 주요 통로였다. 당시 사람들은 친링(秦嶺)산맥(중부를 가로지르는 산맥)을 지나기 위한 길이 필요했다. 이에 계곡 물줄기를 따라 깎아지른듯한 절벽 면에 구멍을 뚫고 지지대를 가로 박은 다음 지지대 위를 목판(木板)을 덮어 잔도를 만들었다.
잔도는 하늘 바로 아래 절벽에 나무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훼손되기 쉽다. 천여 년의 세월 동안 몇 번이나 훼손되었다가 고쳐 지어졌을지 가늠하기 조차 쉽지 않았다.
포사잔도는 특히 잔도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지난 70년대 중국 정부가 이 곳에 댐을 건설하면서 물 속에 잠기게 되었다. 취재팀이 밟고 섰던 지금의 잔도는 원래의 포사잔도가 있던 자리에서 80m 끌어올린 높이에 옛 모습을 본 따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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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사잔도를 모방해 만든 잔도의 모습으로 이 곳에 있던 원래 잔도는 1970년대 석문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었다. |
앞서 한중박물관에서 보았던 ‘석문십삼품(石門十三品)’ 석각은 이 곳 댐 건설 직전에 극적으로 ‘구조’된 것들로 그 외에 대부분의 유적들은 포사잔도와 함께 영원히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방고잔도 위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면 위로 반사된 햇빛과 우거진 숲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삼국시대 당시 군사들의 주요 이동 통로였을 물줄기는 이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관광지로 다시 태어나 사람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하고 있었다.
1km 남짓 걸어가자 작은 정자가 하나 나왔다. 물을 마시며 마른 목을 축이는 사람들,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람들을 비집고 정자 중앙에 섰다. 댐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저 멀리로는 바오허(褒河)진까지 보였다.
푸른 나무 사이사이로 굴뚝 연기가 피어 오르는, 비옥한 토지 위에 들어선 아담한 농촌마을이었다. 그 평화로운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가 무릉도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잔도는 처음 세상에 만들어진 그 날부터 ‘전쟁’과 인연을 맺었다. 포사도의 북쪽 길은 창안(長安)으로 이어지고 남쪽 길을 따라가면 촉에 쉽게 닿을 수 있었기 때문에 포사도는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여기에 진격이 쉽고 퇴각할 때도 공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어 이 곳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치열했다.
세력이 약해 한중으로 물러났던 한(漢)나라 유방이 초(楚)나라의 군대를 무너뜨리고 중원을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계책, 이른바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 겉으로는 잔도를 수리하는 척하면서, 몰래 진창으로 건너가다)’이 이 곳 포사잔도에서 유래되었고 이와 함께 삼국시대의 핵심인물인 조조와 유비, 제갈량 모두 이 곳을 중원 진출의 교두보로 여겼다면, 그 가치가 설명될 수 있을까.
적벽대전에서 패배의 쓴맛을 본 조조는 잠시 숨을 고른 뒤 61세가 되던 해 다시 군사를 모아 한중의 장로(張魯)를 공격했다. 8개월이 흘러 조조는 드디어 한중을 손에 넣게 되었지만 ‘내부적 문제’에 직면해 한중을 거점으로 익주를 차지하겠다는 구상을 접어야만 했다. 조조군의 철수로 기회를 포착한 유비는 218년 친히 군대를 이끌고 한중을 향해 진격했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딩쥔산(定軍山) 에서 조조 수하의 하후연(夏侯淵)의 목을 얻는데 성공했다. 같은 해 3월 조조는 다시 한번 한중 정벌을 노리고 직접 군대를 진두지휘하지만 정세를 뒤집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판세의 불리함을 직감한 조조가 장안에서 물러나면서 한중은 유비의 땅이 되었고 이로써 본격적인 삼국시대의 막이 오르게 된다.
한중을 잃은 ‘한’이 서려있는 포야잔도는 제갈량의 등장으로 비장함과 ‘처절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장소가 되었다. 제갈량은 호남사군을 평정한 이후 한중에 눈독을 들였는데 이 때 포사잔도가 제갈량의 주요 이동경로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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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잔도 풍경구로 들어가는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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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잔도풍경구 양한문화광장 가운데에는 군사를 지휘하며 북벌에 나서는 모습의 제갈량 석상이 서 있다. |
안내원은 이어 “이 서한을 통해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이 바로 이 곳 포사잔도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제갈량은 그러나 ‘한 왕조 부흥’이라는 정치적 이상은 실현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해야 했다. 263년 유선이 싸우지 않고 위(魏)나라에 투항한 것은 군주이자 아비인 유비보다 제갈량에게 통한으로 남을 일일 것이다. 제갈량은 그러나 탁월한 정치가이자 전략가로 칭송받으며 자신의 군주와 나라를 사랑했던 삼국시대의 또 다른 영웅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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