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화랑 엄중구 사장이 엄 컬렉션에 내놓은 베르나르 뷔페 작품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
(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30년전일이다. ‘한국의 모더니스트’ 전혁림화백이 그에게 말했다. “동덕미술관 한번 가보소. 손상기라고, 시커먼 그림이 빛을 발하고 있소. 되게 좋소. 세계적으로 그런 그림 드무요.”
칭찬엔 인색했던 전화백의 말은 충격이었다. “안팔릴 그림이요. 당신이 잘해보소.” 극찬에 못이겨 아침 10시에 찾아간 전시장에서 그와 손상기는 긴장감이 팽팽했다. 안보는척, 아닌척, 서로의 눈빛이 쨍 부딪혔다. ‘곱추화가’ 손상기는 토끼눈이었다. 벌건눈, 뚫어져라 보는 송곳같은 눈. 1시간 반동안 그는 움쩍달싹 못한채 그림만 봤다.
“당시 전시장엔 아무도 없었어요. 말을 걸고 싶은데 말을 못 걸겠더라고요. 전화백이 극찬을 하니까 보긴했지만, 칼싸움하듯 관찰하는 그 눈빛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그렇게 인연이 시작됐지요.”
그는 화상이자 컬렉터인 샘터화랑 엄중구(64)사장이다. 이젠 미술시장에서 ‘손상기=엄중구’, ‘엄중구=손상기’로 오버랩된다.
엄 사장이 손상기를 처음 만났을 당시 손상기는 재료 살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구걸하면서’ 전시를 열 정도로 그림에 무한열정이었다. 친구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100만원을 마련해 준 돈으로 동덕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그렇게 엄사장을 만난 것.
엄 사장은 전시장에서 말도 못붙인 이후 손상기가 더욱 궁금해졌다. 이리저리 수소문하다 친구인 윤범모(경원대교수)가 손상기를 알고 있었다.
굴레방다리 2층에 살고 있다는 손상기한테 윤 교수와 함께 찾아갔다.
“하고 싶은 그림만 그리고싶다”는 손상기의 말을 듣고 엄사장은 “그렇게 하라. 내가 전폭 지원하겠다”고 했다. 당시 손상기는 취미, 입시미술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림을 보고, 손상기 전체를 다 사고 싶었어요. 전 재산을 내놓고 지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요절한 천재작가 손상기 생전모습. |
그날 이후 손상기와 엄사장은 화상과 작가 사이를 넘어 혈연처럼 의지하고 기대했다. 하지만 손상기의 몸은 점점, 삭아들고 있었다.
당시 주치의는 전 박정희대통령 주치의였던 서정삼박사였다. 손상기가 병원에 들락날락하는 일이 많아지자 그가 나서 입원과 치료를 지원하고 나섰다.
손상기는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갈수록 길어졌다. 87년 겨울, 또다시 병원에 입원한 손상기는 가망이 없다는걸 직감했다.
“병원에 갔더니 손상기가 자신이 죽으면 모든 걸 맡기겠다며 손상기 부인과, 나, 그리고 내 부인까지 세명을 부르더군요. 3자 대면속에서 확답을 받겠다는 거였지요. 자신이 죽으면 제 부인은 마음도 약하고 그러니 엄사장한테 모든 걸 맡기겠다는 확답을 부인에게 받고 그자리에서 손상기의 모든 것을 관리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손상기는 39살인 1988년 2월, 침대에 지팡이 하나 덜렁남겨놓고 ‘영원한 퇴원’을 해버렸다.
허망없이 떠난 세월속, 손상기의 확답을 받았지만 유족까지 어쩌진 못했다. 당시 손상기에게 아파트 한채를 사준게 화근이었다. 손상기가 떠난후 그의 가족은 집을 팔았고 이리저리 이사를 했다. 어느날 부인에게 연락이 왔다. “그림을 다 가져가라”. 그림만은 철저하게 지켰던 부인이 건넨 작품은 300여점. 샘터화랑으로 돌아온 ‘손상기’였다.
“나는 손상기의 종이다”라는 엄 사장은 결심했다.(그는 손상기 기념사업회를 운영하며 여수에 손상기 미술관을 추진중에 있다.)
“좋은 그림, 같이보자.”
그는 손상기 전혁림 손장섭 박서보 원석연 이원희등 1000여점의 소장품중 국내 대표작가 작품을 비롯해 베르나르 뷔페, 부샹파이등 92점을 경매에 내놓기로 했다. 총 추정가는 20억원 정도. (엄 사장은 1978년 9월 샘터화랑을 설립한 이후 30년간 미술현장에서 재능있는 작가들을 발굴하여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화상이었을뿐만 아니라 작품에 대한 뛰어난 안목과 지지치 않는 애정을 가진 컬렉터로서 작품의 매력에 푹 빠져 컬렉션을 해왔다.)
그의 소장품은 오는 25일 서울 신사동 K옥션에서 ‘엄 컬렉션과 함께하는 스페셜 경매’에 선보인다. 지난해부터 K옥션이 엄 사장과 논의한 끝에 이뤄진 국내 첫 컬렉션전이다.
소더비 크리스티등 해외경매사에선 유명인사나 저명한 컬렉터의 컬렉션이 그의 이름을 내걸고 영광스럽게 경매하는 것과 달리 국내에서는 부의 상징과 돈 세탁에 연루된 미술품의 사회적인 시선으로 대부분 컬렉터들이 공개를 꺼리고 있다.
때문에 이번 ‘엄 컬렉션’이 주목받고 있는 상황이지만, ‘손상기를 띄우려는 작전 아니냐’는 시선도 만만찮다. (지난해부터 손상기 작품은 경매시장에서 잇따라 고가에 낙찰되면서 경매시장에 핫하다. 작품값은 30년전 무명일 때 호당 3만원이었으나 지난해 9월 경매에서 8호짜리가 9700만원(호당 1213만원)에 팔렸다.)
이번 경매에도 추정가 9천-1억3천만에 나온 손상기의 공작도시 작품등 4점이 출품됐다.
엄 사장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는 “손상기 작품은 10년전부터 사겠다는 사람이 줄을 서있지만 팔지 않았다”면서 “이번 경매는 천재화가 손상기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일반 대중들에게 좋은 작품을 접하고 예술적 안목을 높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고 했다.
추정가 9천-1억3천만원에 경매에 나온 손상기의 공작도시 우.후. |
“솔직히 이번 경매에 내놓은 작품은 아까워요.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컬렉션 경매이니 만큼 시시한 것 내놓아선 안되잖아요. 모두 수작이라고 자부합니다. 작품값도 경매시스템상 반값에 추정가가 매겨졌어요. 나도 화상입니다. 정말 아깝죠. 이번 경매 반응이 궁금합니다. 정말 궁금해서 기대가 됩니다.”
엄 사장은 이번 경매수익금도 손상기를 위해서 쓰겠다고 했다. 손상기의 두딸과 미망인의 생활, 그리고 미술관건립사업등 할일이 많다고 덧붙였다.
‘요절한 천재작가 손상기’ 예찬론자인 엄 사장은 앞으로 꼭 해야할 일이 있다고 했다.
“한국의 로트렉이라고 불리지만 손상기는 세계적인 작가입니다. 앞으로 모마미술관에 걸릴 수 있게 하는게 목표죠. 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파리 퐁피두센터에도 손상기 그림을 걸 겁니다. 반드시 그렇게 할 겁니다. 손상기는 대한민국이 낳은 천재작가이고 세계도 놀랄 작품입니다.”
한편, 19일 오후 5시 엄 사장의 ‘컬렉션 토크’가 마련된다. 좋은 컬렉션 방향에 대한 조언뿐 아니라 작가와의 인연, 화상으로서 경험담을 풀어놓을 예정이다.
K옥션 스페셜 경매기간에는 엄 컬렉션 특별전이 선보인다. 손상기의 영원한 퇴원등 수작을 만나볼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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