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박현주 기자="그땐 혁명이 죄수들을 한 명씩 없앤다는 의미였으니까요. 저는 혁명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고 제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어요. 저는 평생 뭔가를 할 때마다 확실하게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하지만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군요. 제가 1만2천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는 데 함께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부끄럽습니다.”(24쪽)
1만2000명을 죽인 프놈펜 뚤슬렝 S-21 교도소장 깡 켁 이우란. 그는 이 이름보다 '두크'라는 살인마로 더 유명하다. 1970년대 캄보디아 크레르루즈 정권의‘킬링필드 학살기’ 때 S-21 교도소에서 고문과 사형을 책임지고 1만2000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전범이었다.
2009년 3월, 국제 재판소 앞에 선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인정하면서도 결정적인 책임은 지지 않았다. 탁월한 언변으로 법적 그물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자백의 대가’였다.
어느날 S-21에서 실행된 의료 실험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두크의 부하였던 수 티와 프락 칸이 그 부분에 대해 말했다. 자료보관실에서도 의료 실험을 했다는 증거 자료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두크는 자신이 그 일에 전부 개입하지는 않았다고 반박했다. 재판장은 피고인에게 이 실험이 진행된 것을 알고 있었는지 물었다. 두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차분하게 대답했다.
“네, 알고는 있었습니다. 죄수들 중 몇몇이 외과 수술의 실험 대상이 된 적이 있었어요. 혈액을 채취한 사례도 있고요. 하지만 수혈 사실에 대해서는 입장이 다릅니다. 예심 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그 일에 대해서 아는 게 없습니다. 계속 과거를 생각하다보니 상관에게 전화 한 통을 받은 기억이 떠오르긴 합니다. 전투원들에게 수혈을 시켰는데 피부 염증이 일어났다고 했어요. 그것도 제가 저지른 범죄 행위라면 그렇다고 하겠군요.”(388쪽)
그는 과연 인간인가, 악마인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는 역사나 심리학 같은 학문의 미해결 과제 중의 하나다. 국제 전범재판을 전문적으로 취재해온 프랑스 저널리스트 크루벨리에가 쓴 이 책은 중의적 잣대로 두크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며 대학살의 실체에 접근한다. 문학동네 계열사 글항아리가 낸 걸작논픽션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책은 두크에 대한 전범재판 과정을 생생하게 담았다. S-21 교도소와 일명 ‘킬링필드’로 불리는 ‘쯔엉 엑’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처절한 증언은 독자들 또한 어느새 재판을 참관하는 한 사람이 되어 전범재판 과정을 지켜보게 만든다.
법률 잡지 ‘인터내셔널 저스티스 트리뷴’의 수석 편집인을 지낸 저자는 르완다, 시에라리온, 콜롬비아 등에서 일어난 반인륜 범죄와 대학살 관련 국제 재판 때 기자로 활약했다. 당시 경험을 살려 프놈펜 재판 과정에도 직접 참여해 두크의 증언을 보고 들었다.
예리한 관찰력을 발휘한 저자는 두크의 심경과 태도 변화를 꼼꼼하게 묘사했다. 증인으로 참여한 생존자를 비롯해 변호사, 검사, 판사, 방청인의 반응도 놓치지 않고 전했다.
아울러 저자는 두크의 생애 등 관련 정보도 치밀하게 수집했다. 책에는 수학 교사로 살았던 두크의 젊은 시절부터 혁명주의자로 활동하던 모습, 크메르루주가 쇠퇴하면서 외국으로 건너가게 된 과정 등 파란만장한 삶을 파노라마처럼 전한다. 532쪽. 2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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