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한글날은 어김없이 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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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10-0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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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수 문화레저부 부국장겸 골프전문기자

'38살 남성'(뉴스). '좋은 하루 되세요.'(방송 진행자). '1000원이세요.'(톨게이트 직원).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습니다.(리포터). '엄청 덥네요.'(연기자)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과 글들이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어딘가 어색하다고 느낄 것이다.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지식이 얕다고 봐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 말과 글에 관심이 없다는 얘기다.

한글날을 앞두고 본 우리 말과 글은 이처럼 뒤틀리고 엉망진창이다. 얼마 전 공영방송 드라마 제목조차 처음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차칸 남자'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텔레비전 자막이나 신문 제목에서 자주 보는 '38살'은 옳은 표현인가. 글은 쓰인대로 읽게 마련이다. '38살'로 써놓으면 '삼십 팔 살'로 읽어지지, 그것을 '서른 여덟 살'로 바꿔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38세'나 '서른 여덟 살'로 적어야 제대로 된 표현이다.

'좋은 하루 되세요'나 '풍성한 한가위 되세요' '부자 되세요' 등은 어법에 맞지 않는다. '좋은 하루 되세요'는 영어의 '굿 데이'나 '굿 모닝'에서 본받았을 성싶은데, 우리말 어법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아름다워지라'는 뜻으로 '아름다우세요'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다. '좋은 하루를 보내세요' '풍성한 한가위를 보내기 바랍니다' '부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식으로 바꿔 써야 한다.

톨게이트 직원의 '1000원이세요'라는 말은 돈에다 존칭을 쓴 것이다. 요즘 아무 데나 '시'를 붙인다. '존칭 인플레이션'이라 할 만하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아니라 사물에 '시'가 들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1000원입니다'라고 해야 정확히 말한 것이다.

교통방송에서 일하는 리포터나 명절 고속도로 상황을 전하는 방송기자들 입에서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다'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는 말이 예사로 나온다.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다. '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한다'와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있다'(또는 꼼짝달싹 못하고 있다)로 고쳐 써야 한다. 버젓한 '중랑교'를 '중량교'로 갈아치우는 그들이니, 더 기대하는 것이 무리일까.

어른이나 아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엄청'이라는 말이 약방의 감초처럼 나온다. '엄청 커' '엄청 많아' '엄청 인기야'…. 이 말은 10여년 전 유래했다. 모시 속옷 광고 모델로 나온 한 연기자는 "엄청 시원해"라는 말을 거리낌없이 내뱉었다. 그 뒤부터 우리 사회의 편의주의와 맞물려 '나다'는 떨어져나가고 '엄청'만 외따로 쓰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엄청'은 시민들의 말과 글에서는 자주 나올지언정 국어사전에 오르지 못했다. 당연히 '엄청나게 덥네요'라고 써야 옳은 표현이다.

몇 사례만 들었는데도 이렇다. 더 관찰하면 이보다 훨씬 많은 말과 글이 잘 못 쓰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멘붕'이나 '초딩'처럼 국적불명, 어불성설의 말이 유행어랍시고 젊은이들에게 파고든다. 안 될 일이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세자(훗날 문종)에게 일찌감치 양위를 하면서까지 공들여 만든 세계적 발명품이다. 후손들은 그것을 잘 보존해야 할 책무가 있다. 그런데도 우리 말과 글이 이렇게까지 어지럽게 된 데는 리포터·연예인 등에게 마구잡이로 프로그램을 맡기는 방송사, 그곳을 감독해야 하는 방송통신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의 책임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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