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추진된 거액구매는 제1차 통화조치가 있은 직후에 있었던 1억여달러의 구매였다. 1950년 당시 한국의 무역액 규모(수출액+수입액)이 1900만달러였던 것과 비교하면 1억달러는 당시 한국 경제규모에 버금가는 큰 돈이었다.
정부는 통화 조치후의 물가수습을 위해 긴급 구매를 요청됐다. 당시 쌀 국제시세는 t당 150달러 내외였는데, 70여만t의 양곡 구매를 불과 한 달 안에 끝내라는 정부의 성화가 빗발쳤다.
쌀 구매의 루트를 아는 업자들은 모두 대행구매에 나섰는데, 정부구매의 거액 대행업자로는 삼호무역, 천우사, 남선무역, 미진상사, 공성염료 등 수십 개가 있었다.
남전실업이라는 업체는 떡살 구입을 놓고 정부와 갈등을 빚어 검찰사건으로 번진 사례다. 남전실업은 떡살을 구매하여 정부에 납품했으나 정부 측에서 구매수수료 지불을 안 해준다는 이유로 외자구매처를 드나들며 하소연을 했다. 반면 외자구매처는 국제시세가 멥쌀보다 떡쌀이 더 싼데 남전실업이 멥쌀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정부에 납품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남전실업과 외자구매처간의 사전 구매계약 당시 구매수수료 책정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 당시 남전실업은 여 사장이었는데 정부 고위인사층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더 시끄러웠다.
쌀 구매에는 이외에도 수많은 의혹이 제기됐다.
쌀 구매가 시작된 지 1년여 동안 정부 외자구매처는 세 사람의 처장이 경질되었다. 황종률 처장은 쌀 구매로 인책사임을 했고, 이용순, 손노디, 그리고 이용순이 다시 등용됐다.
처장이 바뀌는 동안에도 남전실업사건은 해결되지 않았으며, 여기에 대만산 석탄구입, 목재 구입 등 또 다는 의혹 사건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자리에서 물러난 처장들은 다들 업자들 봐주기를 통해 뒷돈을 받았다는 의심을 받았지만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당시 쌀 구매사건에 입회했던 사람들은 “인책 사임한 처장이 뇌물을 받아 고루광장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모르지만 처장의 집 쌀 뒤지는 텅텅 비어 있었고, 직책에 오점을 남길만한 비리는 일으키지 않았다”며 “외자구매처의 사무적 착오는 인정치 않을 수 없었으나 거액의 방대한 양의 물자를 사전조사 없이 단시일 안에 구매하다보니 이러한 착도는 결국 불가항력이나 다름없었다”고 증언했다. 구매수수료의 결정 없이 구매의뢰를 하는 관청이나 이에 응하는 업자나 모두가 소홀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해외무역의 경험이 전혀 없었던 점도 문제를 일으킨 주요 원인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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