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홍삼 재고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명백한 것은 1945년 9월 9일과 10일 양일간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이 개성인삼출장소 재고 전량을 약탈당했다는 사실이다. 그 후 중국에서 귀환한 오양무역의 손 모라는 한 노인이 끈질기게 해방 후 홍삼 판매계약에 불미한 뒷거래가 따랐다고 고발했으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러한 주장을 매번 되풀이 해왔다.
홍삼에 관해 한 가지 밝혀진 것은 6.25 전쟁 때 북한군이 서울 전매지청의 재고품 10만근을 약탈해갔다는 것과 그 후의 거래에 있어서 조사결과 겨우 반근의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다만 기록에서 들출 수 있는 것은 과도 정부당시 최초의 수출선 앵도환이 2000근의 홍삼을 홍콩으로 수출하였다는 것과, 정부 수립 후 한국문화선전사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홍삼일수판매권을 쥐고 앵도환에 실려나간 홍삼을 현지에서 인수했다는 사실 만이었다.
이 사건은 소송인인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취체역 사장 박흥식이 전매청을 피고로 서울지방법원에 소송한 사건이다.
사유인즉 원고는 해방 직전 1945년 3월 조선총독부 전매국장과 홍삼 9600근의 불하계약을 체결하고, 같은 해 4월 30일 대금 544만4017원을 납부완료 했으나 2050근밖에 인수받지 못하고 해방이 됐니 잔량 7550근을 현물로 내놓으라는 것이다.
원고는 대금은 완납했는데 현품을 인수 받지 못했으니 민법상 위험부담의 이론에 근거하여 불특정물이니만큼 도난여부를 막론하고 현 전매청재고 중에서 인도하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피고 전매청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첫째, 홍삼은 전량 인도되었다는 주장이다. 즉 당시 개성 전매지청 직원의 증언에 의하면 물품은 확실히 개성지청 창고에 있었으나 매수인인 원고가 인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으로 반출하려 하였으나 연합군의 폭격이 두려워 인수를 늦췄으며, 그렇기 때문에 물품은 원고에게 인도된 것이 확실하며, 다만 원고의 편의를 위하여 창고를 빌려주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 원고가 홍삼 대금을 불입한 것은 인정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 국고에 납입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대한민국은 일본제국의 권리 의무를 계승한 재산 상속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원고는 그 회사명과 같이 일본의 전쟁을 협력하기 위한 비행기 제작 기구를 사들여오기 위한 방법으로 홍삼판매의 특권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의 어용상인으로서는 계약 후 곧바로 이를 반출했으나 해상항로의 불안으로 미뤄왔다는 것이다. 특히 8년 후 나라가 전쟁으로 위기에 처하여 있는 상황에서 우리 민족의 적인 일제에 적극적으로 직접 협력하던 소위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가 신생 대한민국에 대해 마치 일본제국의 재산상속인과 같은 태토로 본건 소송을 제기한 것은 법리론 상으로나 민족적 도의로 보나 언어도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언론에 의해 소송 건이 세상에 알려진 후 이 문제는 이념 대립으로 발전했으며, 신문들은 이치에 맞지 않는 해괴한 사건이라며 연일 원고 측에 불리한 보도를 이어갔다. 결국 세 불리를 깨달은 원고는 1953년 6월 11일 권리주장을 포기하고 소를 취하했다.
당시 이 사건에 임했던 전매청 관계자 조 모 씨는 홍삼을 금덩어리처럼 여기던 이 대통령 치하이고 보면 재판에 패소하는 일이 있더라도 현물을 인도치 않을 뱃장으로 굳은 각오를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후 정부가 서울로 수복한지 얼마 안 돼 홍삼 판매권은 대한문화선전사로부터 자유당 재정부장이던 설경동(대한산업그룹 창립자, 1976년 별세)에게 넘어갔고 5.16 군사혁명 후에는 개성인삼조합으로 다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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