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주진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아버지 김홍조(金洪祚)와 어머니 박부연(朴富蓮)의 외아들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장목소학교, 통영중학교(경남중학교로 전학),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덕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자랐다. 그의 낙천적인 성격은 이 같은 가정환경이 바탕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또 어릴 때부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고, 지고는 못사는 승부사적인 기질을 타고 났다.
통영중학교 재학 시절 한국 학생들을 차별대우를 하던 ‘기타지만 수이치로’라는 일본인 교장이 전근을 갔는데, 학생들을 동원해 이삿짐을 나르게 했다. 이때 그는 설탕 부대에 구멍을 뚫어 줄줄 새게 만들었다. 당연히 나중에야 설탕이 줄었다는것을 알게 된 교장은 교감에게 전화를 걸어 범인을 찾으라고 했고, 김 전 대통령은 주저하지 않고 자백해 결국 무기정학을 당했다.
1948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 대학 2학년때 서울 명동서 열린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에서 2등으로 입상한 것을 계기로 당시 외무장관이던 장택상씨와 인연을 맺었다. 그후 1951년 당시 장택상 총리의 비서로 활동하다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 25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을 세우며 화려하게 정계에 공식 입문했다.
이후 1963년 민주정의당 대변인을 시작으로 1965년 민중당 원내총무, 1967년 신민당 원내총무(5년간 5선, 최다선 원내총무)등을 맡는 등 대변인 2번, 원내총무 5번 등 숱한 기록을 세웠다.
초선 당시 자유당 소속이었던 김 전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3기 집권을 위해 ‘사사오입개헌’을 강행하자 과감히 반대표를 던지고 입당 7개월만에 탈당,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후 신익희·조병옥 등 야당원로 밑에서 정통 야당을 이끌어갈 역량을 쌓게 된다.
4대 총선 때는 ‘여촌야도’ 현상을 좇아 고향인 거제를 떠나 부산서구갑에 출마했지만, 자유당의 필사적인 부정선거 공작으로 패배했다. 하지만 그는 1960년 4·19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진 뒤 과도정부에 의해 치러진 5대 총선에서 부산 서구에 재도전해 무난히 원내복귀에 성공하면서 재기한다.
1960년 8월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이 당선됨으로써 다시 여당생활을 하게 되지만, 민주당 구파 일부가 탈당해 신민당을 만들 때 그도 신민당에 입당한다. 하지만 얼마안가 1960년 9월 25일 무장공비(이정섭(당시 25세)과 윤병윤(당시 47세)등.)의 총격에 어머니를 잃는 개인적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후 그는 부산서구에서 80년 5·17 조치로 정치규제에 묶인 기간을 제외하고 모두 일곱 번당선돼 제 5·6·7·8·9·10·13·14대 국회의원까지 9선 의원이라는 최다선 기록도 세웠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터지자 군정에서 계속 그를 회유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군정 연장이 발표되자 김 전 대통령은 반대 시위에 참여하다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김 전 대통령은 야당 당수 세 차례, 야당 원내총무 다섯 차례를 역임하며 평생의 민주화 동지이자 정치 라이벌이었던 ‘DJ'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박정희 군사정권에 맞섰다. 양김의 '상도동·동교동'은 민주화 세력의 양대 산맥으로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70년 9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평생의 라이벌인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패배한 바 있다. 그때부터 YS는 DJ와 50여년간 역사의 동반자이자 영원한 맞수로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까지 애증의 관계는 계속됐다.
1970년대 후반에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야당 당수로서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에 정면으로 맞섰고, 1979년 YH무역 사건 당시 원내 철야농성을 진두지휘하다 총재 직무를 강제로 정지당하고 의원직에서도 제명되는 고초를 겪었다.
그는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은 필연코 머지 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비참하게 쓰러질 것이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의원직 제명 때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같지만 영원희 사는 길을 택할 것’이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신민당의 원내총무와 대변인을 맡아 활동하던 도중, 자신이 탄 승용차가 원인 모를 괴한들이 던진 초산에 습격당하기도 했다. 그는 이 사건을 박정희 정권의 테러라고 주장했다.
신군부 정권 시절이던 1980년대 들어서는 1983년 23일간의 단식 투쟁, 장기간의 가택연금 등의 모진 정치적 박해와 고난을 겪었다. 1984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1985년 신민당 창당, '87년 6월 항쟁' 주도 등을 통해 민주화 운동을 이끌며 군사정권 기반 약화와 직선제 개헌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대도무문'을 좌우명으로 삼았던 김 전 대통령은 평생을 민주화 투쟁과 인권 증진의 외길을 걸으면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자신의 신조처럼 군사독재 종식과 민주체제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권교체라는 국민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후보와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채 통일민주당 후보로 독자출마한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당시 민주정의당 노태우(盧泰愚) 후보에게 패해 2위로 낙선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후 당시 김대중 총재가 이끌던 평화민주당의 약진으로 제2야당의 당수로 밀려났다. 1989년 6월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한국 정치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정의당ㆍ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통해 탄생한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에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고 합류, 박철언 전 의원과의 사활을 건 대결 끝에 대선후보를 쟁취했다. 1992년 대선에서 필생의 라이벌 김대중(金大中)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돼 '군정 종식'을 이뤄내며 '문민시대'를 열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취임사에서 "신한국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눈물과 땀이 필요하다. 고통이 따른다. 우리 다 함께 고통을 분담하자."고 국민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칼국수'로 상징되는 검소함과 청렴함을 표방하면서 군정의 적폐 척결을 위한 하나회 청산과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 수사와 신군부 처벌을 이끌어 냈다.
또 공직자 재산공개, 금융·부동산 실명제 도입, 지방자치제 실시, 전방위적 부패 척결 등을 통해 사회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한 단계 끌어올리는 성과를 냈다.
'역사 바로세우기' 일환으로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고, 쇠말뚝뽑기·구조선총독부 철거와 같은 일제 강점기 잔재 청산 작업을 추진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일본 정계 지도자들이 현재처럼 일제 강점과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정당화하는 발언들을 내뱉자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격한 화법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개혁드라이브 속도를 자전거 타기에 비유, "너무 급히 달려도 위험하지만 달리다가 멈추면 쓰러진다"고 채찍질을 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1994년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6년 신한국당의 노동법 날치기 등으로 정권은 급격한 하락세를 걷게 된다.
1997년 1월 한보 사태가 터지고, 차남 김현철 씨가 이에 연루돼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되는 등 친인척 비리로 개혁 이미지가 크게 퇴색되며 국민의 외면을 받았다.
여기에 1997년 외환 위기에 따른 국가 부도 사태 초래로 임기 초반 누렸던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대부분 상실하며 극과 극을 달린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PK(부산·경남)를 지역 기반으로 삼은 민주화 세력을 일컫는 '상도동계'의 영원한 리더로서 오랫동안 현실 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머리는 빌릴 수 있지만 체력은 빌릴 수 없다”며 평생 거르지 않다시피한 새벽 조깅과 영문이니셜 애칭 'YS'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는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1993) △해리만 민주주의상(1993) △마틴 루터 킹 비폭력 인권평화상(1995) △세계지도자상(1995) △미국 루즈벨트 국제장애인상(1996)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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