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유한(柳韓)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자가 타계한지 한달여 지난 1971년 4월8일, 이날 공개된 그의 유언장은 한국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손녀의 학자금 1만 달러와 학생들이 뛰어놀 수 있도록 만들 유한동산 조성용 토지 5000평을 제외한 전 재산을 공익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현 유한재단)에 기증한다.’
유한은 미국에 있던 장남에게 “대학까지 졸업했으니 자립해서 살아가거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회의 모든 재산을 환원하고, 그가 남긴 것은 양복 두 벌과 구두 두 켤레뿐이었다.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각종 공익재단에 기증한 개인주식은 유한양행 총 주식의 40%에 달했다. 이런 파격적인 결정을 할 수 있던 것은 평소 ‘기업은 사회의 이익증진을 위해 존재하는 기구이며,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한은 현재 말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가장 먼저 실천한 기업인으로 기억된다. 또 ‘청지기’ 정신을 실현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지기는 일과 재산을 맡아 관리할 뿐이며, 누구보다 충성스럽게 노력해야 하는 일꾼이다.
유한은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나 9세의 어린 나이에 홀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독립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며 미시건주립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1922년 대학 친구와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식품회사를 설립했다.
1926년 31세의 나이로 고국에 돌아왔을 때 제법 성공한 청년 사업가로 불렸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펼쳐진 조국의 현실은 일제 식민치하에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비참함 자체였다. 유한은 이런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건강한 국민만이 장차 교육도 받을 수 있고, 나라도 되찾을 수 있다.’
결론을 내린 유한은 그해 12월 ‘유한양행’을 설립하고, 탁월한 경영감각과 혁신적 아이디어로 회사를 굴지의 제약 회사로 키워냈다.
유한은 좋은 제품을 저렴하게 만드는 것이 기업이 할 일이며, 이는 사회에 대한 책임이라고 끊임없이 강조했다. 또 1936년 유한양행을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며 주식의 일부를 직원들에게 당시 액면가의 10% 정도 가격으로 분배해 우리나라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했다.
“기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기업활동을 통한 하나의 공동운명체이다.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을 가지면 성실, 건강한 이윤관, 기업은 사회의 소유라는 의식, 경영자와 종업원에 대한 각별한 의식이 나온다. 여러 사람이 각기 사회를 위해 유익한 기관의 구실을 다할 때 비로소 사회는 완전할 수 있다.”
광복 이후 유한은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족경제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1970년에는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현 재단법인 유한재단)’을 설립해 사회원조 사업이 계속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는 “사람은 죽으면서 돈을 남기고 또 명성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값진 것은 사회를 위해서 남기는 그 무엇이다”라는 자신의 생각을 마지막 순간까지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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