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관정(冠廷)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창업자는 90평생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찰나를 영원처럼, 영원을 찰나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믿음으로 스스로에게 엄격하면서 기업을 일궈 왔다”고 설명한다.
그는 일제강점기, 해방과 6·25 전쟁 이후의 혼란기, 1960~1970년대 개발 시기, 1980년대 이후 선진국 문턱에 이르는 한국사의 격변과정을 겪으며 자립심과 도전정신의 투혼을 발휘해 강건한 국가 공동체 건설에 이바지한 기업인이다.
1923년 경남 의령군 용덕면 정동리에서 태어난 관정은 마산중학교(현 마산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일본 유학을 갔지만, 학도병으로 징병돼 만주·동남아 등지에서 사선을 넘나들다 종전이 돼서야 귀국했다. 대한민국 건국초의 혼란상과 6·25 참상속에서 관정은 고향에서 정미소를 자영하는 일신의 안일함을 떨쳐버리고, 산업보국의 꿈을 품고 상경했다.
황폐화된 조국의 산업을 일으키는 초석은 화학공업이라고 판단한 관정은 1959년 36세의 나이에 삼영화학공업을 창업했다. 초기 꽃장판, 스펀지 등 생활 플라스틱 제품을 생산해 내수 기반을 다져오다, 포장용 필름과 콘덴서용 필름을 국내최초로 개발해 우리나라 수출 상품의 국제경쟁력 향상에 크게 이바지했다.
1970년대에는 국내 전선수요에 적극 대응하고자, 국제전선에 이어 국내 유일의 애자 생산업체인 고려애자공업을 설립해 국내 전력산업에 기여했다.
삼영화학그룹은 현재 14개 계열사를 가진 중견 기업으로, 포장재로 쓰이는 OPP필름 생산에 있어서 세계 3대 메이커로 성장했다.
기업가로서의 명성만큼이나 관정이 존경받는 인물로 부각된 것은 사재(私財)를 출연해 진행하고 있는 장학재단에서 비롯됐다.
“회사는 창업주 개인의 왕국이 아니다”“기업의 목적은 내가 잘살고 내 주변 사람을 잘살게 하는 것”이라며 평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 온 관정의 생활신조는 “만수유(滿手有) 했으니 공수거(空手去)하리라”이다. 손에 가득 쥐어봤으니 갈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뜻이다.
관정은 2000년에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을 설립해 10여년간 개인 재산의 95%에 달하는 8000억원을 사회에 환원했다. 이는 개인이 세운 장학재단으로는 아시아 최대 규모다.
회사 돈이 아닌 순전히 개인 돈으로 앞으로 1조원 이상을 출연하겠다고 한다. 삼성그룹은 물론 재계 주요 그룹도 장학재단 설립시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을 벤치마킹했을 만큼, 모범사례로 자리잡았다.
“이 세상에 작은 발자국 하나라도 보다 오래 남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고민해왔다. ‘후손에게 한 광주리의 황금을 주기보다 한권의 경서를 가르치도록 하라’는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오랜 가훈을 되새겼다”는 그는 ‘자장면 회장’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했다.
대신 “우리나라는 믿을 거라곤 인재뿐”이라며 재단 일이라면 주머니에 있는 동전까지 털어낼 정도다. 관정이 가장 행복한 순간은 장학생이 보내온 감사의 편지를 읽을 때란다.
관정은 오랜 지인인 김재순 전 국회의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돈 버는 것은 천사처럼 못했어도 돈을 쓰는 데는 천사처럼 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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