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 리샤(李霞) 기자 =안후이(安徽)성 핑산촌(屏山村). 크지는 않지만 결코 범상치 않은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289년 전의 옹정(雍正) 년간, 이곳 핑산촌 출신의 서련(舒璉)은 곤경에 빠진 황제를 구해준 공으로 옹정으로부터 어전시위(禦前侍衛)라는 봉호와 구중 처마로 된 사당을 하사 받았다. 당시 ‘서’씨는 핑산촌의 ‘대성(大姓)’이었다.
황제에 대한 중국 백성들의 숭배와 경외감 덕분에 서씨 가문의 ‘어전시위’ 편액과 사당은 오랜 기간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이르러 생각이 바뀐 마을 사람들은 변화하는 시대적 발걸음에 맞춰 사당의 나무 기둥을 허물고, 사당 곳곳에서 떼어낸 철제 부품을 제련해 철강 생산에서 ‘영국을 넘어서고 미국을 따라잡자(超英趕美)’는 전 국가적 운동에 동참했다. 1960년대에는 사당 내부의 진열품과 기둥의 대련(對聯)이 제거됐고, 전 국민이 풍요로운 생활을 하기 시작한 때부터는 그나마 남아있던 목제 자재와 창문까지도 없어지거나 팔리며, 사당의 빈 터에는 새 집이 지어졌다. 오늘날 서씨는 더 이상 핑산촌의 대성이 아니다.
2014년 장전옌(張震燕)이 핑산촌에 왔을 때 서씨 사당에는 ‘어전시위’ 네 글자가 적힌 낡은 문만이 남아있었다. 너비 15m, 길이 41m의 사당은 마을에서 수익사업으로 운영했던 스케이트장으로 쓰였다가 채소밭이 되어 있었다. 비록 낡은 문이었지만, 그 시절 장인이 손수 새겨 넣었을 정교한 조공(雕工)과 후이저우(徽州) 특유의 고급 목재, 후이저우파(派) 건축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는 장전옌에게 큰 놀라움을 안겨줌과 동시에 경앙(敬仰)의 대상이 되었다.
20여 년 간 유명 감독인 장이머우(張藝謀) 작품의 제작 주임을 맡았던 장전옌 역시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1952년 태어난 장전옌은 상하이(上海) 스쿠먼(石庫門)의 작은 골목에서 자라며 서양식 주택 스타일을 눈에 익혔고, 외조부모가 남긴 저택에서 그 세심함과 섬세함을 체득했다. 11살 때에는 베이징에서 무역사업을 하던 부모와 함께 생활하며 사합원(四合院) 중에서도 여러 가구가 함께 사는, 이른바 ‘대잡원(大雜院)’에서 살았다.
1969년, 17세의 장전옌은 헤이룽장(黑龍江) 생산건설부대에 들어가는데, 이는 그 시대 청년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 같은 것이었다. 생산부대 취사병으로 일했던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그는 새벽 5시면 일어나 200여 명의 전우를 위한 식사를 만들었다. 유탸오(油條,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켜 기름에 튀긴 빵)를 만들 때의 소금과 소다, 백반 비율 등 전체 과정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1976년, 7년간의 부대생활을 마친 장전옌은 베이징으로 돌아가 중국청년예술극원(中國青年藝術劇院)의 무대미술 일을 시작한다. 중국 개혁개방 초기였던 그 당시, 중국청년예술극원은 해외 무대예술과 중국의 당대 무대예술 공연의 ‘근거지’였다. 덕분에 장전옌은 <갈릴레이>, <베니스의 상인>, <거리의 빨간 치마(街上流行紅裙子)> 등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다수의 작품 제작에 참여할 수 있었다.
장전옌이 한창 활동하던 시절, 중국인들에게는 보고 즐길 만한 것들이 많지 않았다. 간행물이라고는 <인민일보(人民日報)>, <해방군보(解放軍報)>, <훙치(紅旗)>을 일컫는 ‘2보1간’ 및 <인민화보(人民畫報)>, <해방군화보(解放軍畫報)>, <민족화보(民族畫報)>의 ‘3종 화보’가 전부였다. 공연은 8개의 ‘양반시(樣板戲, 혁명모범극)’ 뿐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정신적· 물질적 ‘결핍 공포증’은 어쩌면 그 시대 사람들이 수집에 열을 올렸던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림을 배웠던 장전옌 또한 일찍부터 수집에 빠졌다. 장전옌의 수집은 장이머우 감독의 작품과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장 감독이 연출한 수 많은 국가급 공연을 보면 반복과 화려함, 웅장함과 세밀함, 빼기보다 더하기를 중시하는 등의 특징이 두드러지는데, 장전옌의 수집활동에도 이 같은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식민지 시절 상하이의 서양식 주택에 쓰였던 타일만 2만 여 점이고, 영화 영사기 100대, 오래된 LP판, 국내외 화가들의 회화작품과 벽난로, 목선(木船), 냉장고 등등 없는 것이 없을 정도다. 미국, 프랑스, 영국, 일본 등 소장품이 만들어진 국가는 다를지 모르지만 이들 수집물들은 모두 19세기 말 구미의 아르 데코(ART DECO)를 추구한다.
‘어전시위’의 낡은 문을 보는 순간, 장전옌은 자신의 수집활동이 마침내 귀착점을 찾았음을 직감했다. 그는 문만 남아 있는 사당의 터에 고급 호텔을 짓고, 자신의 소장품으로 인테리어를 하기로 결심했다. 소장품에 담겨 있는 예술적 품격을 영혼으로 승화시키고, 오랜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중국 고촌 여행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어주고 싶었다. 이는 흡사 15-16세기 ‘대항해시대’에 세계 곳곳에서 수집되었던 보물이며 예술품들이 유럽 귀족들의 생활방식을 바꾸어 놓는 ‘템플릿’이 되었던 것과 같은 일이었다.
‘어전시위’에서 영감을 얻은 장전옌은 곧 계획을 실행으로 옮겼다. 디자인을 하고 자재를 고르고, 공장(工匠)을 찾고 현장을 감독했으며, 인테리어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1년 반 뒤, 마침내 ‘어전시위 부티크 호텔(Imperial Guard Boutique Hotel)’이 문을 열었다.
비 온 뒤의 핑산촌은 더욱 오묘한 매력을 풍긴다. 핑산촌을 둘러싼 산이 옅은 안개로 뒤덮이고 그 사이로 나무들이 어렴풋하게 모습을 드러내면 마치 선경(仙境)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그러다 이른 아침의 햇살이 비치기 시작하면 오래된 민가의 검정 기와와 하얀 벽은 더욱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매일 아침, 어전시위 호텔의 앞문과 뒤뜰에는 한 무리의 젊은 대학생들이 모여든다. 중국 전역의 예술대학 미술과 2학년 학생들로, 1950년대부터 대학교 2학년이 되면 핑산촌에 와서 사생(寫生)하는 것이 미술 전공 학생들의 ‘전통’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의 빼어난 풍광과 민가의 독특한 윤곽, 그리고 단조로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풍부한 채색을 필요로 하는 색감이 학생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소재가 되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어전시위 호텔을 찾고 있지만, 상당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만큼은 예외가 없다. 사실 ‘돈 좀 있는’ 중국인들에게 있어 하루에 1500-2000위안(약 26-34만원) 수준의 숙박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때 영화 제작 일을 했던 장전옌은 예술가인 동시에 전국을 유람하고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오랜 강호(江湖)’이기도 하다. 정갈한 외모와 귀에 쏙쏙 박히는 음성은 누구에게나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총 8개 객실을 보유하고 있는 부티크 호텔은 그에게 ‘작은 강호’다. 장전옌은 이곳의 책임자로서, 그가 있기에 호텔에 에너지가 넘친다.
핑산촌에는 현재 365가구가 살고 있으며, 이 중 30여 가구가 연간 100만 위안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고촌 여행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타지에서 일하던 젊은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다. 마을 지부서기 왕(王) 씨는 똑똑할 뿐만 아니라 친화력 또한 뛰어나다. 한때 타지로 나가 일을 했었던 왕 씨는 장전옌이 시골 마을에 문화적 정취를 불어넣어 주었고, 전통 민가의 가치를 깨우쳐 주어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옛 민가 보호에 앞장서게 됐다고 말했다.
1970년대 생인 한(韓) 씨는 군대에서 전역한 뒤 핑산촌에서 택시를 몰고 있다. 장이머우 감독팀이 핑산촌에서 촬영을 할 때 그의 차를 이용하기도 했는데, 시간이 오래 되면서 한 씨 또한 제작팀의 일원이 되었다. 아름다운 옛 민가에 사는 것이 행복하냐는 질문에 한 씨는 대답했다. “꽃밭에 살아서 꽃 향기를 모르는 것 같다. 새 집에 살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정부에서 마음대로 집을 못 짓게 하고 있어 창문 하나 바꾸는 것도 쉽지 않다.” 후이저우 건축은 창문이 아주 작기 때문에 채광이 부족한 것이 단점이다.
한 씨 세 가족도 여관을 운영 중이다. 총 6개 객실에 일년이면 2000-3000명의 손님이 다녀간다. 허름한 시설 때문에 비수기에는 하루 100위안, 성수기에도 300위안 받는 것이 고작이다. “모두들 장전옌의 어전시위 호텔처럼 바꾸고 싶어하지만 그럴 만한 능력도 안 되고, 의식적으로도 역부족이다.”
어전시위 호텔을 짓기 전인 2009년, 장전옌은 또 다른 고촌인 수리촌(秀裏村)에서 민가 재건축 계획을 구상했었다. 옛 민가 100채를 60개 건물로 재건축한 뒤 후이저우 건축 스타일의 마을로 개발하는 계획이었다. “후이저우 민가는 간란식(桿欄式)에 둘러쌓인 구조가 특징이라 지반을 다질 필요가 없다. 기둥 86개를 끼워 넣어 조립하면 철거와 이동이 쉬워진다. 일주일 동안 타지로부터 기둥 60개를 옮겨 왔었다.” 장전옌은 주변 지역에서 수집한 옛 민가 자재와 고목재, 옛 기와 등을 수리촌의 민가 중건에 사용했다.
모든 행정처리와 디자인, 공사, 인테리어까지 직접 처리할 정도로 장전옌은 열과 성을 다했다. 그리고 첫 삽을 뜬지 5년여가 지나 황무지에 불과했던 130무(畝, 1무= 666.67㎡)의 수리촌은 옛 민가의 문화를 계승하면서도 현대적 거주 스타일과 관광도시의 라이프 스타일에 적합한 곳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많은 노력을 들였지만 수리촌이 워낙 큰 마을이라 세부작업은 아직까지 마무리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농가민박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어전시위 같은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장전옌의 말투에서는 다소 실망스러운 기색이 묻어났다.
동한(東漢)시기부터 중원 일대의 명문대가들은 전란 등으로 인해 후이저우 인근으로 남하했고 이후 서진(西晉), 당(唐) 말기와 북송(北宋)시대에도 대규모 이주가 있었다. 사람의 이동과 함께 중원지역의 부(富)와 인재, 문화, 생산기술 및 생활 방식 또한 옮겨지게 되었다. 다채로운 특징을 갖는 후이저우 문화는 현지의 토착문화와 외래문화가 융합해 생긴 산물이다.
핑산촌 골목을 누비는 미대 학생들, 밤의 어둠을 밝히는 노천바, 길에서 채소와 과자를 파는 아낙네, 어전시위 부티크 호텔, 장이머우 감독의 발이 되어주었던 택시기사 등등…. 복잡하고 무질서한 가운데 포용의 함의를 보여주는 이 모든 것은 장전옌의 소장품과 매우 닮아 있었다.
Tip 1: 핑산촌
안후이성 황산(黃山)시 이현(黟縣) 현성(縣城)에서 동쪽으로 4km 가량 떨어진 곳, 칭양산(青陽山) 아래 자리잡고 있다. 1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촌으로, 마을 북쪽의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하여 ‘핑산촌’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핑산은 본래 서씨 집성촌이었다. 명(明)·청(清) 융성시기에는 대로와 골목이 각각 12개, 6개 였고, 우물과 사당, 누각이 각각 24개, 18채, 16채에 달했고, 민가는 400채가 넘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속에 대부분이 훼손됐고 현재는 부유당(光裕堂)과 성도당(成道堂)을 비롯한 사당 7채와 민가 200여 채가 남아있다. 이중 서경여(舒慶余)사당은 중국 완난(皖南)지역 최대 규모의 명나라 가족사당이다. 핑산촌은 중국 내 전통적 고촌이자 ‘역사와 문화’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Tip 2: 아르 데코(Art Deco)
현대 장식예술을 말하며, 모더니즘 초기 형식으로 알려져 있다. 아르 데코란 1925년 파리에서 열린 ‘현대장식미술·산업미술 국제전'에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이집트 고물(古物)에서 나타난 화려한 고전예술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3300년 전의 고물, 특히 투탕카멘의 황금가면은 간단하면서도 기하학적인 도형, 금속과 흑백의 색으로 최고의 장식효과를 구현했다. 이러한 투탕카멘은 1922년에 발견되어 전 유럽을 뒤흔들었고, 1920년대 말부터 영국과 미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뒤 1960년대 다시금 유행하기 시작했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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