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김창익 기자 = 살인사건이 나면 누구나 범인으로 지목할 수 있는 '유주얼 서스펙트(Usual Suspect: 유력한 용의자)'가 1차 수사 대상이 된다. 그래서 유능한 수사관일 수록 '유력한 용의자는 오히려 용의자가 아니다'라는 수사 격언을 잊지 않는다. 정황과 증거 등 논리적 연결성이 지나치게 완벽한 경우 음모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의 장자 김정남(46) 독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이 꼽힌다. 백두혈통의 적자로 권력투쟁의 씨앗을 제거하려는 동기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최근 대한민국으로 망명을 시도했다는 정황도 제거의 결정적 빌미가 됐다는 증언도 나온다.
너무 유력한 용의자는 범인이 아니라는 공식도 이 경우 예외가 될 수 있다. 일반 형사 사건의 경우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 받을 사람이 실제 범행하는 것은 “나를 잡아가라”는 바보짓이다. 하지만 김정은의 경우 자신이 살해 지시를 했다고 만방에 알린들 처벌이 가능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따라서 이번 사건의 주범이 김정은이라는 가정은 사실일 확률이 거의 100%다. 하지만 김정은이 주범이든 아니든 국제사회는 그를 직접적으로 처벌할 수단이 없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의 범인이 누구냐는 사실 중요치 않다.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거나, 혈육을 죽인 인두껍이란 오명을 안기는 것 외에 국제사회가 김정은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작 중요한 것은 ‘김정은이 왜 김정남을 죽였나?’이다.
이번 암살은 백주대낮이 가까운 오전 시간에 국제공항 한복판에서 이뤄졌다. 마치 보여주기라도 하 듯 말이다. 누군가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일 가능성이 큰 대목이다. 김정남을 제거한 이는 누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것일까.
이와 관련 국정원 국장출신 A씨가 한 발언이 주목된다. 그는 한 매체에서 “중국이 북한 사회주의 체제는 그대로 두고 김정은만 교체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고 이 경우 김정남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김정은의 핵도발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강하게 압박하는 가운데 중국이 김정은 제거 시나리오를 짤 수 도 있다는 얘기다.
이는 미국이 최근 발언수위를 높이고 있는 북한 선제타격론이나 김정은 참수작전 등과 관련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선제타격이나 참수나 결국은 김정은 체제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인데 문제는 그 이후다. 김정은 제거의 주체가 미국이 될 경우 미국이 통제할 수 있는 정권의 수립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곧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를 의미한다.
김정은 참수작전을 중국이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아이러니 하지만 이런 이유로 김정은 참수작전의 주체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럴 가능성이 더 크다고도 볼 수 있다. 중국의 관심은 북한 정권의 왕좌에 누가 앉느냐가가 아니라 미중 패권전쟁의 방파제로서 북한 사회주의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가에 집중된다.
전 정보당국자의 말대로 중국이 김정은 참수작전을 먼저 실행하고 김정남을 옹립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단순히 음모론의 커튼 뒤로 가려버릴 수는 없는 이유다.
김정은은 적대국인 미국은 물론 형제국이었던 중국 모두에게 제거 대상이 돼버린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사회주의 체제 유지와 전복이란 상반된 목표를 가진 중국과 미국이 김정은 제거란 공동의 목표를 갖게 된 것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김정은이 어떤 도발을 저지를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 우리가 처해있는 것이다.
‘김정남 암살은 누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기 위함인가?’란 질문으로 돌아가 보면 답에 조금은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정은 체제를 끝내고 김정남을 왕좌에 앉힐 수 있는 중국에 대한 경고 메시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도 김정은이 유력한 용의자란 가정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너무 유력한 용의자는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다시한번 상기해 보면 유력한 용의자의 뒤에 숨어 있는 음모의 주인공도 있을 수 있다. 김정은 제거 뒤에 오는 친중파 김정남의 사회주의 체제가 달갑지 않은 사람은 김정은 뿐만은 아니란 말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