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속의 중국…차이나타운에서 쌓는 '왕서방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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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6-12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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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차이나타운 전경[사진=인천관광공사 제공]


아주경제 기수정 기자=유년시절에는 비둘기가 총총걸음으로 모여드는 자유공원으로 나들이를 자주 갔었고 국민학생(지금의 초등학생)·중학생 때는 친구들과 동인천 지하상가 선물가게를 자주 찾곤 했다. 물론 생일파티는 인근 패스트푸드점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미림극장이나 인형극장에 가서 새로 나온 영화를 봤다. 모아둔 용돈을 갖고 배다리에 헌책방에 가서 참고서를 구입하고 양키시장으로 건너가 메이커 트레이닝복(1999년 당시에는 유명 메이커 트레이닝복을 입는 것이 유행했었다.)을 샀으며 그 후에는 신포국제시장으로 건너가 달콤한 닭강정을 먹으며 식당 벽에 낙서를 하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였다.

나의 살던 고향 인천 중구에서 보낸 시절의 추억의 빛은 바랬지만 여전히 그곳에 가면 절로 웃음이 나고 한껏 설렌다.

지난주 이곳을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것들이 변한 듯했지만 여전히 내 눈에는 추억의 동네였다.

사설이 길었지만 신포국제시장 나들이 후 소화도 시킬 겸 천천히 걸어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누구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중국풍 거리가 눈에 들어오면 바로 그곳이 차이나타운의 시작점이 된다.

우뚝 솟은 패루는 포토스폿이 된 지 오래다. 패루를 지나 경사진 길을 걸어 오르다 보면 T자형으로 길이 양쪽으로 나뉜다. 오르는 내내 중국의 거리에 온 듯한 상가들을 마주할 수 있다.

주변 상가는 온통 중국의 거리에 온 듯이 느껴진다.

붉은색 간판과 홍등, 홍두병을 파는 가게, 상점 안팎에 진열된 상품들까지······. 이곳은 그냥 중국이다.

이곳에 터전을 잡은 이도 화교들이었다. 누구보다도 눈물겨운 세월을 보내면서 화교 사회의 명맥을 이어 왔다.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근대화 과정의 중심 인천. 이곳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중국인이 상업을 위해 자리를 잡고 고난의 세월을 보냈던 곳이 바로 오늘날의 차이나타운이다.

이들은 인천항으로 들고나는 배들의 짐을 운반하는 일을 하며 ‘짜장미엔’을 만들어 먹었고 우리는 거기에 ‘캐러멜’을 더해 우리만의 짜장면을 만들었다. 차이나타운에 가면 최초의 중국집 ‘공화춘’이 짜장면 박물관으로 단장한 후 관광객을 맞는다. 

차이나타운을 걷다 보면 삼국지 벽화 거리를 만난다. ‘삼국지’의 명장면을 벽화 160점으로 압축해 보여준다.

삼국지 벽화 거리를 지나 언덕에 오르면 자유공원을, 밑으로 내려가면 개항장 인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근대역사문화타운을 만날 수 있다.

인천 개항장 근대 역사문화 타운은 근대 은행, 제물포 구락부(클럽), 물류 창고 등 이국적인 옛 건축물을 인천 개항박물관, 인천 개항장 근대건축 전시관, 한국 근대문학관 등으로 재탄생됐다. 

일본제1은행을 리모델링한 인천 개항박물관에서는 개항기 우표, 인천 전환국 압인 주화 등 근대 문화와 관련된 유물을 살펴볼 수 있다.

일본이 한국 금융계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세운 인천 일본18은행 지점은 리모델링을 거쳐 인천 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태어났다.

대한통운 창고를 개조한 인천아트플랫폼도 꼭 가봐야 할 곳이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 장소로 사용돼 유명세를 치른 이곳에서는 1년 내내 다양한 전시가 열린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상징 '패루'[사진=인천관광공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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