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차이나 프리즘] 남·북·중 경제 네트워크 복원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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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철 기자
입력 2017-08-0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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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태우 정권 때 남·북 밀월관계

  • 수교 이전부터 中도움 물물교환

  • 한·중 수교 앞당기는 계기 작용

[김판수 국립인천대 중국학술원 연구교수(사회학 박사)]

김판수 국립인천대 중국학술원 연구교수(사회학 박사)

오는 24일은 한·중 수교 25주년이다. 양적으로 볼 때 한·중 교류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해왔다. 그러나 오랜 ‘교제’에도 불구하고 상호불신이 커진 것도 사실이다.

굳이 사드(THAD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탓할 것도 없다. 지난 4반세기 동안 경제적 이익에 치중한 반면, 사회적 협력 체제 구성에는 소홀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원인은 한·중 양자관계보다 남·북·중 삼국관계에 있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부터 최근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에 이르기까지, 한·중 관계에서 북한은 ‘변수’보다 ‘상수’에 가까웠다.

돌이켜보면 한·중 수교가 촉진된 계기도 1980년대 말 노태우 정권이 주도한 남·북한 밀월 관계에서 파생된 남·북·중 네트워크 때문이었다.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1987년 러시아의 정치경제 자유화 선언 등이 이어졌고, 뒤이어 북한도 체제 전환을 모색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도 급격한 민주화 이후 노동의 힘이 강해지고 있었다. 문제는 한국의 ‘자본’ 측이었다. 대기업들은 국내 임금상승에 따른 손실을 공산권 진출을 통해 보상받으려 했다. 이에 노태우 정권은 1987년 헝가리를 시작으로 폴란드, 중국, 러시아 등 공산권 국가들과의 경제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국내에서 가장 눈독을 들였던 ‘황금 시장’은 북한이었다. 북한은 우리에게 언어 장벽이 없고 운송비도 적었으며, 노동력도 저렴한 시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정권은 대기업을 위한 ‘특별 서비스’를 따로 준비했다. 바로 남북 무역의 무관세화, 즉 북한산 물품을 국산으로 인정한 것이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 100원에 구입한 해산물, 농작물, 축산물을 한국에 들여와 1000원에 팔면 각종 비용을 제해도 최소 5∼7배 남길 수 있었다. 현대, 삼성, 럭키금성(현 LG), 대우 등 대기업들은 정부의 지원 속에 북한 진출 기회를 얻었다.

문제는 ‘휴전선’을 직접 오갈 수 없기에 반드시 ‘중공’을 경유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노태우 정권은 1988년 7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내 공식 명칭을 중공에서 ‘중국’으로 변경해 한·중 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남·북 관계 또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 수 있었다.

초기에는 현대가 북한 사업을 주도했지만,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대북사업과 관련한 언론 공개 수준이 위험 수위에 이르자, 주도권은 대우그룹에 쥐어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우그룹의 남·북 무역은 거의 비공개로 진행됐다.

따라서 그 기록은 당시 실무자 인터뷰를 통해서만 찾아볼 수 있다. ㈜대우 부장이었던 K씨는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북한을 오가며 대북 사업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이다.

K씨는 입북을 위해 먼저 홍콩에 갔는데, 당시 홍콩에는 ㈜대우가 북한 무역을 위해 위장 설립한 제3국 법인이 있었다. 그 후 홍콩 법인이 베이징(北京)에 설립한 지사의 도움을 받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 베이징 공항에서 북한 대사관 사람을 만나 한국 여권을 맡기고 이름 한 글자가 변경된 북한 여권을 발급받았다.

이처럼 K씨는 ‘북한인 신분’으로 조선민항기에 올라 평양과 베이징을 오갔기에 그의 북한 무역은 공식 기록에 남지 않았다.

초기에 대우는 북한에 공산품들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자연 생산물을 받아 한국에 유통시켰다. 1990년대에 황금알을 낳는 남·북 물물교환이 개시된 것이다.

남·북 밀월 관계가 중단된 것은 1990년대 말부터 심화된 북핵 문제 때문이었다. 1991년 경제인들의 북한 입국이 금지됐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남·북 무역은 일정 기간 동안 더 지속됐다.

이미 ‘외상’으로 상당액의 물건을 줘 당연히 대가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다만, 무역 공간은 평양에서 베이징으로 이전됐다. K씨도 1991년 중국 베이징으로 발령받아 남·북 무역을 계속 이끌었다.

이처럼 한국 대기업은 남북 교류를 목적으로 중국에 법인을 설립했지만, 북핵으로 인한 교류 중단 이후 자연스럽게 중국 진출로 전환됐다. 이런 조건에서 1992년 한·중 수교도 촉진됐다.

그러나 교제의 목적이 상호 이해와 협력보다 ‘경제적 이익’에 있었기 때문에 한·중 간의 교제 기간이 길어질수록 불신의 벽만 더 높이 쌓였다.

현재 문재인 정부는 북한과의 새로운 교류를 위한 물꼬 트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 목적이 사회적 협력에 있을지 과거처럼 경제적 이익 추구에 있을지, 아직은 모호하다.

특히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이 실현될 경우, ‘자본’의 국내 손실을 국외에서라도 보상받을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하는데, 이 과정에서 북한은 또다시 가장 위협적인 국가에서 가장 매력적인 시장으로 재부상할 수도 있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봤을 때 북한은 일종의 ‘개혁·개방’ 초입 단계에 들어섰다고 평가할 수 있다.

어쨌든 현재 남·북·중 네트워크 재생을 위한 기회의 장이 열리고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한·미·일 동맹을 공고화하면서도, 1950년 이후 끊어졌던 ‘대륙으로의 육로’를 잇기 위한 노력도 경주해야만 한다.

한·중 수교 이전에도 중국의 지원 속에 남북 교류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양국 수교 25주년의 가치를 남·북·중 네트워크 자산으로 접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우선 지난 25년의 한·중 교제를 기반으로 삼아 북한을 그 교제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첫걸음이다.

눈앞의 이익을 좇기보다는 남·북·중 네트워크를 만들고 ‘우리’라는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한 사회적 협력을 강화한다면, 한반도 및 동북아 평화 실현도 그리 머지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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