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서구화 흉내 내기, 뾰뜨르 개혁
[사진 = 뾰뜨르 대제]
서구화의 상징인 러시아의 뾰뜨르(피터)대제에게는 별명이 두 개 있다. ‘이발사 짜르(황제)’ 라는 별명이 그 하나고 '처형관 짜르'라는 별명이 다른 하나다. 이 두 별명은 뾰뜨르의 서구화 정책의 성격을 대변해주고 있다.
[사진 = 수염 깎는 황제 뾰뜨르]
첫 번째 별명은 서구의 생활습관을 따르기 위해 직접 면도기를 들고 측근들의 턱수염을 깎아준 데서 나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란자에 대한 무자비한 처형으로 얻은 별명이다. 그 것은 또한 뾰뜨르의 서구화 개혁 정책이 러시아를 근대화시키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흉내 내기 수준의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절대주의 신봉․농노제도 심화
[사진 = 네바강과 뻬쩨르부르그]
근본적으로 그는 절대주의를 절대적으로 믿으며 짜르가 나라의 주인으로 모든 권력을 쥔 채 러시아를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개혁은 여기에 맞춰 진행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 상징적인 것이 수만 명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희생 위에 세워져 '뼈와 피 위의 도시'라고 불리는 지금의 상뜨 뻬쩨르부르그(페테르부르그)건설이다. 그 같은 개혁은 러시아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에게는 아무런 혜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더 무거운 세금과 부역 그리고 병역에 시달려야 했다. 위로부터의 개혁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상층부인 귀족층과 농노를 포함한 다수의 일반 대중들 사이의 괴리 현상은 더욱 벌어지게 됐다. 더욱이 후계자들이 반동정치를 펼치면서 농노제도를 바탕으로 한 전제정치가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체제반발 자생적 사회주의 태동
[사진 = 제까브리스트의 난 (겨울궁전 앞)]
이러한 상황에서 밑으로부터의 개혁 요구가 표출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 첫 번째 현상이 무수하게 이어진 농민 반란이었다. 그 흐름 속에서 발생한 것이 1825년 12월 일어난 제까브리스트(데카브리스트:Dekabrist) 반란이다. 이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은 주로 상류층의 젊은 자제들이다. 이들은 밑으로부터의 혁명이 일어날 경우에 가져올 폐해를 막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예방적 차원의 혁명이 있어야한다고 믿었다. 반란은 비록 실패했지만 그 여파는 러시아에서 자생적인 사회주의를 태동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사진 = 까브리스트 처형자(뿌쉬긴 노트)]
이후 짜르의 전제정치와 농노제도 타파를 목표로 혁명을 꿈꾸는 숱한 자생적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공개적으로 표방하고 나선 사람이 러시아 사회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게르쩬( Ге́рцен: 헤르첸:Herzen)이다. 게르쩬과 같은 생각을 가진 벨린스키도 전제정치를 타파하는 인민혁명이 일어나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회주의 국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마르크시즘과 결합, 사회주의 혁명으로 종결
[사진 = 칼 막스 석상(모스크바)]
1840년대에 태동된 이 같은 사상을 더욱 확산시키면서 과격한 방법을 들고 나온 사람들이 체르니세프스키(Chernyshevskii)로 대표되는 1860년 사람들이다.
[사진 = 레닌 좌상(모스크바)]
체르니세프스키의 사상은 레닌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나중에 레닌은 자신의 유명한 논문 ‘무엇을 해야 하나? (Что делатъ:쉬또 젤라찌?:What is to be done?)를 체르니세프스키의 저서 제목에서 그대로 따오기도 했다.
[사진 = 플레하노프]
[사진 = 레닌과 볼쉐비키]
[사진 = 레닌과 스탈린]
[사진 = 레닌 장례식]
이들 자생적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에다 마르크시즘을 접목시켜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시스트 조직을 탄생시킨 혁명가는 플레하노프(Plekhanov)다. 여기에서 시작된 혁명 운동은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절정에 달하게 되고 마침내는 러시아의 전제체제를 무너뜨리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종결된다.
▶타타르 지배 유산이 혁명 발발 원인중 하나
[사진 = 짜르군의 시위대 발포(1905)]
자본주의 단계 이후에 찾아온다는 공산주의 체제가 자본주의로 한 발자국도 옮겨 놓지 못했던 러시아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가 지닌 전근대적인 체제와 후진성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체제에 대한 반발이 자생적 사회주의의 싹을 틔우게 만들었고 그 것이 마침내는 공산주의 혁명을 불러오는 출발점이 됐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러시아가 20세기 들어 공산주의 종주국으로 부상하게 되는 여러 가지 요인 중에 하나를 그들 역사가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르는 몽골의 지배에서 찾아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몽골의 지배는 비록 수백 년 전에 끝이 났지만 당시의 멍에는 지배 종식과 함께 소멸된 것이 아니고 여전히 보이지 않는 멍에로 남아 있었다. 몽골 지배의 유산의 바탕 위에서 러시아의 전제정치와 농노제도가 그 똬리를 틀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체제는 타타르的 체제"
몽골을 가리키는 타타르라는 러시아어 속에는 ‘야만적인’, 또는 ‘강압적인’ 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19세기 러시아의 이상주의자들은 전복해야할 러시아의 후진적인 체제를 타타르적인 체제라고 비난했다.
즉 그들은 타타르 멍에의 유산이 당시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물론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게 된 여러 가지 직접적인 요인이 있고 엎치락뒤치락하는 그 진행과정도 복잡하다. 그러나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그 가운데 몽골의 러시아 지배 유산도 체제를 뒤엎는 계기 가운데 하나가 됐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 타타르 멍에 유산에 대한 재평가 작업
[사진 = 혁명군, 겨울궁전 점령]
긴 세월동안 러시아를 지배했던 몽골은 거기에 버금가는 세월동안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그 압제에서 벗어나자마자 몽골은 러시아의 후신인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해 70년을 그 영향권 아래서 지냈다. 그 것을 역사의 부메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다. 많은 러시아의 역사학자들, 특히 민족사관을 가진 학자들은 몽골의 지배가 러시아에 미친 영향을 외면하며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여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과거의 역사를 보다 냉철하게 직시해야한다는 주장과 함께 몽골의 지배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타타르의 멍에와 그 유산을 어떻게 재해석할 지 관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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