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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25] 암살집단 어떻게 장악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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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12-2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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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암살자’ 이스마일파(Ismailism)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시아파 분파 가운데 하나가 ‘암살’이라는 말로 떠올리게 하는 이스마일파다. 여러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어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 종파가 바로 훌레구의 원정군에 의해 함락된 대표적인 시아파다. 이들이 몽골군에게 장악된 것은 바그다드가 함락된 것보다 먼저다. 훌레구의 군대는 이스마일파를 제압한 뒤 바그다드로 향했다.

이 종파도 8세기 후계자 선정과정에서분쟁을 겪으면서 이스마일이라는 인물을 받들고 갈라져 나온 분파다. 이들은 특히 아바스 왕조의 수니파와 격렬한 투쟁을 이끌면서 한 때는 아라비아 반도를 휩쓸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이스마일의 한 분파는 10세기 이집트를 점령하고 그 곳에 ‘까이라’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 도시가 바로 지금의 이집트 수도 카이로다. 그러나 11세기 후반 들어 힘이 약해지면서 이스마일파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듯 보였다.

▶ ‘암살자’의 기원 알라무트 이스마일파

[사진 = 엘부르즈 산맥]

그러나 그들 가운데 이란의 엘부르즈(Elburz)산 깊은 산중으로 흘러 들어가 알라무트(Alamoot)라는 난공불락의 성을 쌓고 위세를 떨친 집단이 있다. 그들이 바로 동방(東方) 이스마일파다. 역사상 ‘암살교단’으로 알려진 이들의 활동은 ‘아사신’(Assassin:암살자, 자객 )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아사신’이라는 말은 아랍어에서 대마초를 부르는 ‘하시신’(al-hashishin)에서 유래됐다.

이 말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유럽으로 흘러들어 간 뒤 암살자를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바로 대마초를 먹고 암살행위를 저질렀다는 데서 대마초가 암살자라는 말로 대체된 것이다. 엘부르즈 산맥은 지금 이란의 수도 테헤란과 카스피해 사이에 동서로 걸쳐 있는 산맥이다. 이 산맥은 카스피해 연안을 따라가다가 동쪽에서 후라산과 만난다. 엘부르즈 산 속의 알라무트 성채를 방문했던 사람들이 전하는 것을 보면 이 성채는 산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 바위산 정상의 천혜 요소

[사진 = 알라무트 성]

테헤란에서 북서쪽으로 140Km 정도가면 엘부르즈산맥 서단의 남쪽 기슭에 카즈빈(Qazvin)이라는 도시가 있다. 그 곳에서 100Km 정도 험한 산 속으로 들어가면 거대한 바위산을 만난다. 그 곳이 바로 독수리 요새라고도 불렀던 알라무트 성이다. 성의 앞면은 60도 정도의 가파른 경사로 이루어진 바위산이고 뒷면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그 산 정상에 성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도 현장에는 성벽을 쌓았던 벽돌무더기가 있고 바위 사이에 대형 우물도 있어 오랜 포위에도 견딜 수 있었던 천혜의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현장을 방문했던 언론인들이 전하고 있다. 이들 암살자 집단의 얘기 역시 이 근처 지방을 지나면서 전해 들었다는 마르코 폴로가 기록해 놓고 있다. 마르코 폴로가 훌레구의 이 지역 정벌이 있은 지 18년 후에 타브리즈에서 발흐로 이동해 갔으니 엘부르즈 산 근처를 지난 것이 거의 확실하며 이 지역을 지나면서 이스마일파에 대한 얘기를 들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마르코 폴로가 기록한 암살자 얘기

[사진 = 마르코 폴로(드라마)]

‘산상의 노인’ (Sheikh al-jabal: 산속의 쉐이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 산 계곡에 천상의 낙원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암살지령을 받은 자에게 하시신을 넣은 음식을 먹인 뒤 이곳으로 데리고 와 사치와 향락에 젖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산해진미와 미주(美酒)가 넘치고 아름다운 여인과 마약이 있는 곳, 이 산중의 오아시스에서 향락을 즐기도록 만든 암살자를 다시 마취시켜 알라의 전사로서 반대파의 요인들을 암살하게 만든다는 얘기다.


암살자들은 죽는다 해도 자신이 몽혼 상태에서 즐겼던 낙원으로 돌아간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체포돼 처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그들의 얼굴은 황홀감에 젖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대마초를 먹여 비몽사몽(非夢似夢)한 상태에서 암살행위를 자행하도록 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 공포의 이미지 남긴 이스마일파

[사진 = 이스마일파 언급(동방견문록)]

다만 이들이 암살에 나선 것만은 여기저기서 확인된다. 몽골의 장수를 암살하고 대칸 뭉케를 살해하기 위해 자객을 보냈는가 하면 셀주크의 재상과 라틴왕국의 국왕도 이들에게 암살됐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과격 행동을 비난할 때 그 근원을 이스마일파까지 거슬러 올라가 태생적인 배경을 거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중동지역 경영을 노리는 몽골이 으스스하고 공포감을 주는 이미지를 지닌 이들 집단을 가장 우선적으로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꼽은 것은 당연했다. 훌레구는 뭉케로부터 서방정벌을 지시 받고 나설 때부터 이스마일파 제거와 압바스 왕조의 토벌 임무를 부여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란 주변지역은 이미 칭기스칸이 아프간과 이란 일부 지역을 정복한 이후 오고타이가 그곳에 이란총독부를 설치하면서 나름대로 지배권을 확보했다. 비록 느슨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지금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이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지역 등이 몽골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이처럼 이슬람 동부 지역 대부분이 영향권 아래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이스마일파만 굴복시키면 이 지역은 사실상 평정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훌레구의 산중요새 압박

[사진 = 몽골군 중동 정벌]

훌레구는 이미 몽골을 출발하기에 앞서 선발대 1만 2천명을 나이만 출신의 장수 키트부카에게 주어 엘부르즈 산으로 출발시켰다. 하지만 선발대는 난공불락의 성을 완고히 방어하는 이스마일파를 상대로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몽골을 떠난 뒤 느리게 이동해 간 훌레구의 본대는 2년 뒤인 1256년, 아무다리아(Am u Drya)강을 건넜다.

강을 건넌 뒤 이스마일파와 산중의 요새가 공격 목표라고 모두에게 알렸다. 이 상황에서 반 몽골노선을 표방했던 이스마일파의 진영에 변수가 생겼다. 당시 교주인 모하메드 3세가 측근에게 살해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뒤를 이어 교주가 된 루큰 웃 딘 프루샤(Rukn ad din Prusha)는 아버지와는 달리 전쟁을 피하는 대신 교섭을 통해 가능하면 탈 없이 지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훌레구는 프루샤에게 계속적으로 양보를 얻어내면서 목표물에 대한 포위망을 좁혀 갔다.

▶ 더욱 두려운 존재로 부상한 몽골군

[사진 = 몽골군 중동 정벌]

외부로부터 단절되면서 이스마일파의 결속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적지 않게 고전할 것으로 예상했던 몽골군은 상대방이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탓에 손쉽게 성채를 접수했다. 프루샤가 항복하면서 곳곳의 성문이 잇달아 열렸다. 당시 서아시아 최강의 집단은 변변한 전투 한번 해보지도 못한 채 몽골에게 접수됐다. 투항한 프루샤는 대칸을 알현하기 위해 몽골로 갔다가 대칸을 만나지도 못한 채 돌아오는 길에 몽골호위 부대에 살해됐다.

[사진 = 몽골군 이슬람지역 전투]

이슬람 세계는 물론 유럽까지 그 명성을 떨쳤던 서아시아의 강력한 세력은 166년에 걸친 활동을 이렇게 마감했다. 이스마일파의 붕괴는 거의 모든 무슬림과 유럽인들에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두려운 존재를 짧은 기간 안에 쉽게 제압한 몽골군은 더 두려운 존재로 떠오르고 있었다. 시아파의 핵심세력인 이스마일파와 아바스 왕조를 차례로 사라지게 만든 훌레구군의 서쪽 원정을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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