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신년사를 발표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일자리, 평화, 개헌, 외교·안보 등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그 이후 약 1시간 동안 대통령이 직접 지명한 기자가 질문하고 대통령이 답하는 형식으로 질의응답을 진행했습니다.
미리 짜인 각본은 없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명박근혜 6년간 ‘짜고 치는 고스톱’에 익숙해진 탓인지 왠지 새삼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다른 역대 대통령의 신년사는 어땠을까요? 유형별로 나누어 보니 크게 3가지였습니다.
◆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질문을 싫어한 독재자들
신년 기자회견은 박정희 대통령이 연임하면서부터 시작됐습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넣은 뒤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한 박 대통령은 자신의 장기집권 야망을 이루기 위한 장치로 신년 기자회견을 이용한 것입니다.
1968년 첫 신년 기자회견은 그야말로 ‘발연기’의 향연이었습니다. 청와대는 미리 각본을 준비하고 지정된 기자가 박 대통령에게 질문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준비한 대로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고 정권을 홍보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발표하고 스스로 제8대 대통령이 된 지 2년째인 1974년 3시간 넘게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10·26 사건으로 마지막 신년 기자회견이 있었던 1979년에는 각본에 없던 질문을 한 기자에게 몇 달 뒤 박 대통령이 박치기했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박 대통령 암살의 혼란을 틈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1980년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없애고 국회에서 신년 국정 연설을 했습니다. 전 대통령은 1985년에서야 신년 기자회견을 부활시켰습니다.
어설픈 연극은 계속됐습니다. 그나마 기자회견에 참석한 기자의 수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전 대통령이 취임 후 64개 언론사를 18개로 ‘강제 통폐합’하고, 언론자유 침해에 항의한 기자들을 대거 해직시킨 탓입니다.
당시 KBS와 MBC에서 오후 9시를 알리는 시보가 울린 후 나오는 첫 소식에서 바로 전 대통령 찬양하기 위한 뉴스를 내보내 ‘땡전 뉴스’라는 비난을 들을 정도였으니 신년 기자회견은 하나 마나 한 것이었습니다.
최근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1987’의 소재인 박종철, 이한열 두 대학생의 죽음으로 전 대통령의 시대는 끝이 납니다. 하지만 서울의 봄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권력이 전 대통령과 함께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던 노태우 대통령에게 다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노 대통령은 ‘보통 사람’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그 이후 기존 군사독재 정권과 차별성을 강조했지만 신년 기자회견은 ‘약속 대련’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정치 역시 독재의 시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 ‘기자들 드루와’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은 달변가들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이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드디어 민주주의 정권이 수립됐습니다. 군부독재의 엄혹한 시절을 헤쳐나온 민주투사답게 그는 ‘촌철살인’의 달변가였습니다. 기자들과 자유로운 질의응답을 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김 대통령 재임 기간부터 신년 기자회견이 비로소 대통령의 국정 운영과 정책 방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됐습니다. 다만 원활한 진행을 위해 질문 내용을 기자들이 만들어 청와대에 전하고 청와대가 중복 질문을 빼고 순서를 정했습니다.
집권 2년 차를 맞은 1994년 1월 김 대통령은 각본 없이 첫 신년 기자회견을 진행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끌고 가는 솜씨는 돋보였지만 내용이 미흡하고 질문에 답변하지 않은 게 너무 많았다"고 평했습니다.
신년 기자회견에서 정부의 구체적인 국정 목표를 제시하는 전통은 제15대 대통령인 김대중 대통령으로 이어졌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집권한 김 대통령은 1998년 1월 '국민과의 대화'라는 공개방송 형식으로 기자회견을 진행했습니다.
외환위기로 기업들의 부도 사태가 이어지고 정리해고로 고통받는 국민이 늘어나던 때라, 국난을 극복하려면 국민을 설득하고 협조를 구해야 했던 것입니다. 다음 해에도 ‘국민과의 대화’ 형식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에게 국난 극복을 위한 노력을 호소했습니다.
기자들의 질문은 경제정책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 대통령은 증시 활성화 방안, 시중은행 합병 문제, 지방경제 활성화 대책, 경기 호전 전망 근거 등을 능수능란하게 답해 계속되는 위기에 지친 국민에게 작은 희망을 전했습니다.
평소 참모들과 격의 없는 토론을 즐긴 것으로 유명한 노무현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도 ‘자유 질문’ 형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예고 없이 청와대 출입 기자들이 상주하는 춘추관을 찾아 직접 국정 운영을 설명하는 일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를 시도하는가 하면 일본을 방문해서는 ‘일본 국민과의 대화’도 했습니다. 2006년 1월에는 밤 10시에 특별연설을 생방송으로 진행해 인기 드라마와 시청률 경쟁을 하는 파격도 선보였습니다.
노 대통령의 이런 행보는 늘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취임 2주 만인 2003년 3월 전국에 생중계된 ‘검사와의 대화’에서 검사들은 검찰 개혁을 국정과제로 꼽은 노 대통령에게 공격적인 질문 공세를 퍼부었고 잇달아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 백 투 더 퓨처? 아니 백 투 더 패스트!
2007년 1월 미국의 부동산 거품 붕괴로 세계 경제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제17대 대통령에 기업인 출신의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됐습니다. 이 대통령은 기자의 질문을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신년 기자회견도 없앴죠.
대신 연초마다 자신이 뽑은 청와대 참모들을 옆에 앉혀놓고 일방적인 국정 연설을 했습니다. 민주주의 정권이 수립 이후 이어온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의 전통을 군부독재 시절과 같은 수준으로 되돌려 놓은 것입니다.
이 대통령은 가물에 콩 나듯 열리는 기자간담회에서도 극히 적은 질문만 받고 답변은 원론적인 것에 그쳐 ‘맹탕·재탕·허탕’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 대통령이 좋아하는 것은 ‘일방통행’이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KBS 라디오를 통해 무려 100번 넘게 국정 연설을 했습니다.
제18대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세 차례 신년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매번 1시간이 넘는 질의응답을 사전에 철저히 준비한 각본대로만 진행했습니다. 사전에 조율되지 않은 기자의 질문엔 “잘 모르겠다”며 즉답을 피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집권 2년 차인 2014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는 말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2016년 1월에는 '기자회견 질문지'라는 13가지 내용이 온라인상에서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청와대는 이를 궁색하게 반박했지만 실제 신년 기자회견의 질문 순서가 유출된 질문지와 일치해 원성을 샀습니다. 이 사건은 외국으로도 알려져 아일랜드의 한 기자가 “대통령을 위한 질문을 기자들이 미리 제출하는 게 저널리즘이냐"는 글을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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