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0년대까지 한국에선 이승만 정권을 타도한 4·19 혁명이 일어나고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타도를 위한 민주화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기는 했지만 반미 운동은 없었다.
또한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 시절 당시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인권 외교 정책을 내세우며 박정희 대통령과 격렬히 대립했고 이로 인해 한·미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런 이유로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이전까지 한국에서 미국은 ‘민주주의 모범국이자 한국을 지켜준 은혜의 나라’로 인식됐고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들은 미국이 전두환 신군부의 학살을 막아줄 것으로 기대하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퇴각한 직후인 1980년 5월 22일 당시 존 위컴 주한유엔군 및 한미연합군 사령관은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5·18 민주화운동 진압을 위한 20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했다.
이어 미국은 오키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대와 필리핀 수빅만에 정박 중인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한국 근해에 출동시켰다. 이는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지지를 나타낸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결정을 내린 기관은 미국 국방성, 국무성, 국가안보회의 정책위원회였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당시 미국 고위 인사들의 상식 이하의 막말은 반미 운동을 더욱 확산시켰다.
전두환 신군부의 5·18 민주화운동 학살 진압이 이뤄진 직후인 1980년 8월 존 위컴은 LA타임스와의 회견에서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한국의 안보가 유지된다면 이를 한국민의 뜻으로 받아들여 전 장군을 지지할 것”이라며 “한국민은 들쥐와 같은 민족이어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복종할 것이며 한국민에게는 민주주의가 적합치 않다”고 말했다.
또한 존 위컴은 8월 27일 AP통신과의 회견에서 “한국의 10월 사태(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이후 미국의 대한 정책에서 가장 성공한 일 중의 하나는 전두환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며 우리의 보람도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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