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교육’이 초반부터 이토록 큰 인기를 끄는 이유는 그 짧은 숏츠 영상 안에서 불의가 응징되는 ‘사이다’ 장면이 충분히 느껴진다는 데 있다. 일단 알고리즘에 침투한 이 영상을 끝까지 보게 하는 시원한 사이다의 맛이 ‘참교육’에 있는 것이다.
'사이다물'의 역사, 시초는 '권선징악'
불의가 응징되고 선이 시원하고 통쾌하게 승리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나 드라마를 특별히 ‘사이다물’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사이다물’이 없었던 걸까.최초의 ‘사이다물’이 뭔지 AI에게 물으니 ‘춘향전’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곰곰이 생각하니 일리가 있다. 사회적 약자 계층인 춘향이가 사또 변학도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을 때 고관대작이 돼 돌아온 영웅 이몽룡이 이 모든 부조리를 타파하고 탐관오리를 물리쳐 춘향이를 구해내는 이야기. 신분제에 고통받던 당시의 서민들에게 이보다 통쾌한 이야기가 또 있었을까.
‘사이다물’은 용어만 새롭게 붙여졌을 뿐, 사실 이야기의 기본 틀은 ‘권선징악’이다. 이 이야기는 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와 함께 해온 유구한 역사가 있다.
불의가 단죄되는 장면은 현실에서 쉽사리 만날 수 없는 순간이다. 각자 나름대로 실제 삶에서 만나는 부당함, 부조리, 불공정, 갑질, 부패들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것이 해결되는 감격의 순간을 얼마나 만났겠나.
사람들은 그 답답함을 가상의 이야기로 일부나마 해소해가며 삶을 영위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류의 역사가 흘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했던 ‘권선징악’의 이야기가 최근 몇 년 사이 ‘사이다물’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고 유독 인기를 얻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권선징악' 대신 '사이다'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걸까.
한국 사회의 답답함이 구체화되는 시기, '사이다'가 탄생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사이다'라는 표현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이후다. 드라마를 보며 답답한 전개에는 '고구마', 통쾌한 반격에는 '사이다'라는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재미있는 건 이 표현이 등장한 시기와 한국 사회가 체감한 답답함의 종류가 묘하게 겹친다는 점이다. 취업은 어려워졌고, 집값은 오르고, 노력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은 점점 희미해졌다. 갑질, 학폭, 입시 경쟁, 세대 갈등, 불공정 채용 같은 단어들이 일상이 됐다.
사람들은 더 이상 악당 한 명이 벌을 받는 이야기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게 됐다. 자신이 실제로 겪고 있는 문제를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성공한 사이다물은 단순히 빌런을 무너뜨리는 작품이 아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가장 답답해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작품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2021년에 등장한 드라마 ‘모범택시’를 들 수 있겠다. 시즌 1 당시 15%를 오르내리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해 큰 사랑을 받았고 시즌 3까지 제작됐다. 이 시리즈는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피해자들의 복수를 대신 해주는 이른바 ‘대리 복수’를 소재로 한다.
학교폭력, 직장 내 괴롭힘, 디지털 성범죄와 보이스피싱 등 사회적으로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던 여러 사건들을 차용했다. 현실에서는 복잡한 법적인 과정을 거쳐 힘겹게 그리고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풀린 사건들을, 불법과 편법을 넘나들며 유쾌·통쾌하게 한방에 해결하는 김도기와 그 일당들에 시청자들은 크게 호응했다.
OTT 시리즈 ‘더 글로리’도 성공한 ‘사이다물’의 대표적인 예다. ‘더 글로리’는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철저하게 복수하는 단순한 이야기지만 유독 이 시리즈에 사람들이 뜨겁게 반응한 건 학교폭력의 피해자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침묵 속에서 방치돼 왔는지를 정확히 건드렸기 때문이다.
문동은(송혜교)이 겪은 폭력은 단순한 개인의 불행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축소되거나 방치돼 왔던 학교폭력의 집약체를 상징하는 듯했다. 시청자들은 가해자들이 무너지는 장면에서 통쾌함을 느꼈지만 그 이전에 문동은이 견뎌야 했던 긴 시간의 고통에 먼저 공감했다. 그래서 ‘더 글로리’의 복수는 단순한 응징이 아니라 뒤늦게 실현되는 정의처럼 받아들이기도 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영화 ‘베테랑’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을 쫓는 형사 서도철(황정민)의 이야기는, ‘돈 있고 빽 있는 사람은 처벌받지 않음’에서 오는 사람들의 좌절을 건드렸다.
관객들이 가장 크게 환호한 것은 서도철의 끈질긴 추적도 그렇지만, 안하무인 조태오가 문구점 사장님(마동석)에게 한 소리를 듣는 장면이다.
까메오로 출연한 짧은 장면인데 마동석의 등장만으로도 조태오는 순간 위축된다. 그 짧은 순간 미세하게 주눅이 든 조태오의 표정에 관객들이 아마 가장 통쾌했을 것이다."나 여기 OO박스 사장인데..."
최근의 '참교육' 역시 교권 붕괴와 학부모 갑질이라는 현실의 논쟁 위에서 반응을 얻고 있다. 이 작품은 학교 현장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문제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묘사가 다소 과장됐을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이미 자신이 느끼고 있던 부조리가 비로소 드라마라는 형식 안에서 영상화되고 언어화되는 순간 열광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열광한 '사이다물'의 진짜 정체는?
하여 모든 사이다물이 사람들에게 통쾌함을 주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복수극은 넘쳐나고 참교육물도 쏟아지지만 대부분은 금새 잊힌다. 현실의 갈증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한 사이다는 탄산 빠진 설탕물과 다를 바 없다.사람들이 원했던 것을 정확히 들여다보면 사실 사이다의 시원함이 아니다. 누군가는 내가 느끼는 답답함을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확인, 그리고 언젠가는 바로잡힐 것이라는 작은 위안 같은 것에 가깝다.
그러니까 사이다물의 역사는 권선징악의 역사가 아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가장 불공정하고 비합리하다고 느꼈는지, 그리고 무엇이 가장 절실하게 바로잡히기를 바랐는지를 기록한 또 하나의 사회사(史)라고도 볼 수 있다.
결국 사이다물은 현실을 잊게 만드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외면할 수 없었던 현실을 가장 선명하게 비추는 이야기다. 사람들이 어떤 사이다물에 열광했는지를 들여다보면,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에 분노했고 무엇을 바꾸고 싶어 했는지도 함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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