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답사나 체험을 먼저 떠올리는, 여행에 대한 인문학적 역발상
'가보지 않은 여행기'(정숭호)라는 책을 읽는다. 그 여행지를 직접 간 것이 아니라, 문학 속에서, 혹은 예술 속에서 다양하게 접한 그곳을 마음 속으로 옮겨와 호젓이 거니는 인상적인 여행이다.
여기엔 몇 사람이 시차를 두고 바라보고 즐긴 풍경들이 통시적 겹눈으로 들어와 앉아, 형언할 수 없는 인문학적 풍경을 이룬다.
37세 괴테는 달밤에 베니스 주데카 섬 해안에서 곤돌라를 탄다. 거기서 사공들이 양쪽에서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듣는다.
가까워지는 소리와 멀어지는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차이를 귀로 느낀다. 먼 노랫소리엔 믿을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인 무엇이 있었다. 멀어지는 노랫소리가 자아내는 까닭 모를 깊은 애상. 이 슬픔은 도대체 무엇이 만드는 것일까. 거리일까, 소리가 줄어들면서 생기는 것일까, 작은 소리를 듣고자 귀기울이는 인간의 감수성 때문일까. 파도와 뒤섞인 소리의 습기 때문일까.
달빛에 젖으며 스러지는 노래의 몽환에 괴테가 빠져있을 때, 늙은 하인이 '리도 출신 여자들의 노래가 좋다'고 얘기하면서 이런 말을 해준다.
"남정네들이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가면, 저녁 때 아낙들이 바닷가에 앉아 멀리 퍼지는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서, 저 멀리에 있는 남편들이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한답니다."
# 먼 해변에서 부르는 아내의 노래를 알아듣는, 고깃배 위의 남편
파도소리에 반쯤 파묻힌 채 멀리서 들리는, 귀에 익은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노동의 피로를 푸는 남편. 저 노랫소리 하나로 먼 바다 위로 이어진 마음의 일렁이는 한 가닥 같은 것. 그녀들이 부른 노래는 타소의 노래였다.
괴테가 이곳에 온 것은 그가 존경했던 르네상스 이탈리아 시인 토르쿠아토 타소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가 7년째 만지작거리고 있는 희곡 '타소'를 완성하기 위해 타소가 숨쉰 현장의 공기를 호흡하고 싶어서였다.
그가 굳이 한 시인의 삶을 희곡으로 쓴 것은, 신분 규율이 엄격했던 당시 예속된 시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동질감과 문제의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 이탈리아 시인 타소의 노래, 그리고 괴테
타소의 노래가 흘렀던 베니스의 리도는 이후 세대인 토마스 만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도 사랑받는 해변이었다.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늙은 작가 아센바흐가 리도해변을 찾아와 같은 호텔에 묵고 있던 아름다운 한 소년을 먼 발치에서 오래 바라보다가 세상을 떠나는 이야기다. 리도의 햇살이, 멀리 바다에 선 소년과 해변에 누운 그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고개가 꺾인 노인 사이에서 사위어 가는 모습은 가히 잊지 못할 장면이다.
작가이자 기자인 정숭호는 매년 9월 베니스영화제가 열리는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곤돌라 뱃사공을 노래를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리도여인들이 돌아오는 사랑을 향해 부르던 먼 목소리의 타소의 노래는 들을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독서메모]괴테가 감탄한 대목이 마음에 내내 사물거린다. 곤돌라를 타고 출렁이는 뱃전의 양쪽에서 듣는 사공의 노랫소리. 양쪽에서 스테레오로 들리는 사공들의 노랫소리. 한쪽에선 잦아들고 한쪽에선 커져오는 그 소리. 파도에 적셔진 멋 노랫소리가 더할 수 없이 사무치는 비창이라는 것. 가까운 소리보다 먼 소리가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저녁답 낚싯배에 고기를 싣고 귀가하는 남편을 향해 이쪽 해변에서 넓고 깊은 목소리로 시인 타소의 노래를 불러주는 아내의 깊고 울림있는 목청. 그 먼 노랫소리를 들으며 귀를 열고 피로를 씻는 남편의 이야기. 베니스의 이 놀라운 청각적 풍경이 귓전에 맴돈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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