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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농이 고종과 나눈 문답지[사진=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불을 끌 실력이 없으면, 불을 지를 생각을 말아야 한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 임오군란 때 대원군이 그랬고, 민비가 그랬다. 오합지졸 끌어모은 시아버지나 외국군대 끌어들인 며느리나 이악스럽기로는 막상막하, 어리석기로는 오십보백보. 청나라 군대가 진을 쳤고, 곧이어 제물포조약으로 일본군이 들어왔다.
조정은 청나라 등에 업힌 민씨 수구당(守舊黨)이 장악했다.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얼마나 위세를 부렸을지 눈에 선하다. 입술을 깨무는 개화당을,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꾀었다. 함께 유신(維新)의 길로 가자고. 독(毒)은 더 큰 독을 불러들인다. 서로 먹겠다고 으르렁거리는 외세 사이에 낀 약소국이 흔히 겪는 사태의 전개였다.
개화당 지도부는 양반댁 도련님들이었다. 그들의 기억에는 삼전도의 치욕만 남아 있었나 보다. 안남(安南, 베트남)을 놓고 프랑스와 싸우는 통에, 조선에 주둔하던 청나라 군대 절반이 남쪽 전선으로 차출됐다. 김옥균(金玉均, 1851~1894)과 그의 동지들은 일본군의 힘을 빌리면 승산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던지, 우정국(郵政局) 낙성식 축하연을 틈타 거사(擧事)했다.
일본은 청나라에 맞서기에는 아직 키가 작았다. 위안스카이가 움직이자 일본군은 인천으로 내뺐다.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은 ‘삼일천하’로 막을 내렸고, 김옥균들은 정처 없는 망명길에 올랐다. 이상(理想)을 좇은 선의(善意)의 발로(發露)라고 좋게 평가하기에는 너무나 치명적인 불장난. 조선은 열강의 이빨 앞에 내던져졌고, 한양은 무방비도시로 전락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왕조의 운명은 사실상 결정이 났다.
운명의 여신은 잔인하다. 동농은 갑신정변의 주역들과 가까웠다. 김옥균은 집안 아저씨뻘(나이는 동농이 다섯 살 많다)이고, 박영효(朴泳孝)와도 흉허물없이 우정을 나누었으며, 서재필(徐載弼)과도 각별하게 지냈다(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p124~125). 낙백 시절 그는 양이(洋夷)에 매우 적대적이었으나, 완서 이조연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에 끌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조연이 또 다른 친구들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조연은 수구당으로 분류될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임오군란 때 영접관으로 청나라 군대를 맞아들이고, 민비(閔妃)의 최측근에서 군권(軍權)을 행사하던 그를, 개화당은 살려둘 수 없었을 것이다. 난세(亂世)에는 옥석(玉石)이 구분(俱焚)된다고 했던가.
“조약상의 분규를 공이 해결해 위로는 주상의 걱정을 풀어 주고, 아래로는 민정을 진정시켰다. 그런데도 흉역(凶逆)들은 화심(禍心)을 품고 신기(神器, 왕위)를 엿보면서 공을 비롯한 현류(賢類)를 무참히 살해했다”
(동농이 쓴 이완서조연제문(李浣西祖淵祭文), 신동준 <한국사 인물 탐험>에서 재인용)
<김가진평전>을 집필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이조연을 ‘근왕파 개혁관료’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조연이나 그를 죽인 개화당이나, 따지고 보면 모두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 밑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서얼이라는 신분의 벽이 이조연으로 하여금 대궐에 줄을 서도록 만든 점을 간과하면 안 되겠지만, 결국 고종이라는 암군(闇君)이 이 동창생들을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로 내몬 거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엽기적인 권력다툼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종과 민비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려면, 역사책 뒤지는 것보다 차라리 요즘 막장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부부를 만나는 게 더 빠르다. 종업원을 개돼지로 여기고, 회삿돈 빼돌리는 데 혈안이다. 이씨 집안도 그랬다. 이 부부 뒤치다꺼리하다 비명에 간 충신(忠臣)과 재사(才士)가 어디 한둘인가.
동농의 며느리 수당(修堂) 정정화는 그의 회고록 <장강일기>에 ‘인천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거사에 관여할 수 없었다’고 썼다. 한홍구 교수의 추측은 다르다. 이조연과의 관계, 특히 제문(祭文)의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적어도 이 시기의 동농은 김옥균들의 급진적 개화노선보다는 근왕(勤王)과 동도서기(東道西器)에 바탕을 둔 보수적이고 점진적인 개혁노선을 따른 게 아니었을는지. 만일 동농이 먼저 출사했다면, 갑신정변 때 횡사(橫死)한 사람은 이조연이 아니라 김가진이지 않았을까.
◆꿈에 그리던 대과(大科) 급제
갑신정변으로 개화당은 싹이 말랐다. 민씨들이야 가렴주구에 워낙 바쁜 사람들이라, 개혁 실무도 모르거니와 맡을 생각도 없다. 고종 22년(1885년) 6월, 조정은 동농을 내무부 주사(主事)로 불러들였다. 이조연이 생전에 동농의 인물됨을 어전(御前)에 아뢰었는지는 확인된 바가 없으나, 고종은 그를 세 차례나 인견(引見)하고 개혁방안을 물었다.
“그중 가장 고종의 관심을 끈 것은 전보총사(電報總司) 설치였다. 그리하여 전보총사가 설치되었고, 또 전보학(電報學)에 최우수 요원을 선발, 그들로 하여금 각국의 전보사무규정을 모아 차례로 전선을 가설하여 드디어 만국과 통신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전신이 가설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러한 공으로 우정사(郵政司) 총판(總辦)으로 임명되어 교통, 체신사무를 총괄하기도 하였다.”(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p125)
9월에는 형조정랑(刑曹正郎)에 임명되었다. 내무부 주사도 겸(兼)했다. 개혁사무를 처리하는 동농의 솜씨는 모나지 않고 깔끔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조정 한가운데로 진입했다. 마치 죽은 이조연이 살아 돌아온 듯, 고종은 동농을 수시로 불러 국정 대소사를 하문(下問)했다. 그는 전보총사에 이어 종목국(種牧局) 설치를 건의(1886)하는 등, 나라를 살찌우는 길을 제시해 왕의 은혜에 보답했다.
결과적으로, 갑신정변은 동농이 조정의 중신(重臣)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김가진의 충성심과 능력을 확인한 고종은, 그를 왕실이 주도하는 개혁의 친위(親衛)로 삼겠다고 결심한다. 그러자면, 신하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겨줘야 했다. 고종은 몇 년 전 이조연에게 그랬던 것처럼 김가진에게 대과 응시자격이라는 파격적 은전(恩典)을 내린다.
그리고 고종 23년(1886) 3월 29일, 고종은 대과(大科)에 급제한 그에게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을 제수하고, 격려의 뜻으로 궁궐에서 사악(賜樂)을 베푼다. 신분의 벽에 막혀 분루(憤淚)를 삼켜야 했던 그가, 명문가의 적자(嫡子)만에게 허락된 청요직(淸要職) 중의 청요직, 옥당(玉堂)에 오른 것이다. 이것이 동농이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을 올린 최초의 일이었다.
◆“공사(公使) 대신 직무를 수행하라”
동농의 임무는 주어진 관직에 한정되지 않았다. 고종은 무시로 그를 궁중으로 불러 면대(面對)하고, 조정의 공식 지휘계통을 밟아서 처리하기 곤란한 일들을 맡겼다.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막을 내린 지 2년. 청나라 군대의 횡포는 극에 달했다. 위안스카이는 섭정(攝政)처럼 굴었고(이때가 그의 나이 이십대 초반이었다), 재정고문 진수당(陳樹棠)은 남대문에 ‘조선은 청국의 속방(屬邦)’이라는 방문(榜文)까지 붙였다.
견디다 못한 고종은 청나라의 간섭을 줄이고자 열강의 힘을 빌리기로 한다. 마침 동농은 고종의 밀지(密旨)를 각국 공사관에 전달해 협조를 구하는 비밀전령의 역할을 수행하던 참이었다. 고종이 우군(友軍)으로 점찍은 나라는 러시아였다. 동농은 베베르(Karl I. Veber, 아관파천 때 철가방으로 음식을 날라 고종의 식사를 해결한 독일여성 손탁은 그의 처형이다) 러시아공사에게 ‘청국의 내정간섭에 항의해줄 것’과 ‘청국이 거부할 경우 군함을 파견해 조선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고종의 비밀문서를 전했다.
그러나 아뿔싸. 이 일이 그만 민씨들의 귀에 들어가고 만 것이다. 고종과 민비는 서로 딴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민영익(閔泳翊)이 위안스카이에게 고자질을 했고, 위안스카이는 한달음에 달려가 고종에게 김가진을 엄벌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고종이야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했을 터이고, 동농은 상국(上國)을 능멸한 죄로 귀양을 가게 됐다. 이것이 우리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이른바 ‘제2차 한러밀약(1886년 7월)’ 사건의 전말(顚末)이다.
고종이 내심으론 동농을 감싸고, 러시아가 항의해준 덕분에 곧 풀려난 동농은, 그해 10월 주차청국천진주재종사관(駐箚淸國天津駐在從事官)으로 파견돼, 청나라에 ‘한러밀약’을 해명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호구(虎口)에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배짱 좋게 청나라 인사들을 두루 만나 그들을 안심시키고, 양무운동(洋務運動) 현장을 시찰한 뒤 귀국했다.
고종은 열강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계속하면서,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날 길을 모색했다. 고종 24년(1887) 5월, 일본 도쿄에 조선공사관이 문을 열었다. 초대공사는 민비 척신(戚臣) 민영준(閔泳駿). 고종은 김가진을 주차일본공사관(駐箚日本公使館) 참찬관(參贊官)에 임명하고, 다음과 같은 밀명을 내렸다. “공사(公使)를 보좌하되, 공사가 잠시라도 공서(公署)를 비우거나 휴가차 본국에 돌아갈 때에는 대신 직무를 수행하라.”
* 이 연재는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농 김가진전>(학민사, 2009)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을 저본(底本)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정리 = 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
사진 = 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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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주역들. 오른쪽부터 김옥균, 서재필, 홍영식, 박영효.[사진=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일본을 업고 일으킨 정변, 동농의 벗 이조연도 죽여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
김옥균(金玉均)을 중심으로 하여 1874년경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개화당은, 1882년 임오군란으로 커다란 장애에 부딪히게 된다.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는 개화당의 개화정책과 개화운동이 궁극적으로 청국으로부터의 조선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라 보고, 온갖 방법으로 개화당을 탄압하고 개화운동을 저지하였다.
개화당은 청군을 몰아내고 나라의 완전 독립을 이루기 위해 먼저 정권을 장악하여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하기로 하고, 1883년부터 무장 정변을 모색하며 준비를 진행시켜 나갔다. 김옥균 등 개화당은 부족한 무력을 보충하고 청군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측의 호의에 응하고, 일본 측으로부터 공사관 병력 150명과 일화 3백만 엔을 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일본군은 왕궁 호위와 청군에 대한 방비만을 분담하고, 국내 수구파 제거와 내정개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본 측으로부터 약속받은 개화당은, 1884년 12월 4일 홍영식(洪英植)이 총판으로 있던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다. 개화당은 우선 국왕과 왕후를 창덕궁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기고, 군사 지휘권을 가진 수구파 거물 한규직․윤태준․이조연 등과 민태호(閔台鎬)․민영목(閔泳穆) 등 민씨 일파 핵심세력을 국왕의 이름으로 불러들여 처단하였다.
청나라 군대는 12월 5일 개화당의 지지자로 위장한 심상훈(沈相薰)을 경우궁으로 들여보내 민비와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 그들의 계획을 전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청군의 계획을 알게 된 왕후는 경우궁이 좁아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며 창덕궁으로 환궁을 적극 주장했고, 국왕도 이를 지지하였다. 김옥균은 창덕궁은 너무 넓어 개화당의 소수 병력으로 방어에 극히 불리한 점을 들어 반대 의사를 밝혔으나, 민비는 계속해서 창덕궁 환궁을 요구했다. 그런데,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청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하자, 김옥균이 이를 받아들여, 결국 12월 5일 오후 5시 고종과 민비는 창덕궁으로 옮겼다.
개화당의 설득과 압박에 고종이 혁신 정강을 재결하고 개혁정치 실시 조서를 내린 12월 6일 오후 3시, 청군이 1,500명의 병력을 두 부대로 나누어 창덕궁의 돈화문과 선인문으로 각각 공격하여 들어왔다. 이에 개화당이 이끄는 조선군이 응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밀려났고, 일본군은 싸우지도 않고 인천으로 도주했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주역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홍영식 등 사관생도 7명은 고종을 호위하다가 청나라 군대에게 피살되었다. 그 뒤 국내에 남은 개화당들은 민씨 수구파에 의하여 철저히 색출되어 수십 명이 피살되었고, 개화당은 몰락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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