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하얼빈역 확장공사로 2년전인 2017년 3월 하얼빈시 조선민족예술관으로 임시 이전했던 '안중근의사 기념관'. 역사(驛舍) 공사는 작년 12월 끝냈는데도 일본과의 관계를 의식해 재개장을 미루고 있다는 우려가 나올 때쯤이었다. 지난달 30일 불쑥 현지매체인 하얼빈일보에 '당일 재개관' 공지가 떴다. 이후 국내언론 기자들은 부랴부랴 달려가, 새롭게 열린 이 기념관의 모습을 다양하게 취재해 보도했다. 보름쯤 지난 지금엔, 안의사 기념관 현장에 담긴 숨은 뜻을 곱씹으며 숙연히 거닐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 '투 포인츠(2 Points)' 기념관
2019년 4월 9일 쌀쌀하지만 하늘이 눈부신 아침. 하얼빈역 신축 건물 앞 광장에서 왼쪽 모퉁이를 돌면 역사(驛舍) 측면으로 들어가는 입구 하나가 보인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라는 붉은 간판은 열차 모양을 떠올리게 한다. 아치형 문을 들어서면 기역자로 꺾인 길쭉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 공간을 이렇게 꺾은 까닭은, 이 기념관의 진정한 주인공(?)의 위치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어디에 있을까. 문을 열고 입장하면 정면으로 안중근 동상이 보인다.
이 동상에서 주목해야할 핵심은 머리맡에 있는 '시계'다. 총성이 울린 그 아침의 찰나는, 당시 동양의 역사를 바꾼 시각이었으며, 중국의 항일투쟁의 신호탄이 울린 시각이다. 이 동상은 '안중근의 9시30분'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하고 있다.
전시장은 '안중근의 시간'을 보여준 뒤, 공간을 기역자로 꺾어 그의 삶과 죽음을 말하는 기록물과 사진들, 그리고 서예작품을 벽에다 빼곡히 진열해 놓았다. 이 복제품들은 '인간 안중근'을 음미하는 '기억의 회랑'을 위한 설치물이겠으나 이미 알려진 자료들의 전시에 그쳤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기념관만이 지니고 있는 '독보적인 유물'은 그 전시장 너머 창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개의 점(2 Points)이었다. 이 기념관이 만들어진 까닭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전시장의 막다른 벽에는 창문이 있었고 그 너머에 하얼빈역 객차 철도와 승객들의 탑승 통행로가 보였다. 창에 붙어 바라보면 10m쯤 되는 통행로가 보였고 왼쪽에 삼각형으로 된 표시가 있었고 그보다 철도 쪽으로 다가간 오른쪽에 원형으로 된 표시가 있었다. 삼각형과 원형 사이는, 5m 정도 되는 거리였다. 걸음으로는 6보, 통행로 블록으로 보면 7개쯤을 사이에 둔 지척(咫尺)이다.
중국이 엄연히 타국인이 타국인을 쐈던 '안중근 의거'에 열광하는 것은, 당시 범접할 수도 없는 최고의 국제적 정치권력을 일순간에 허물어뜨린 담대한 결행 때문이었다. 중국인들에게도 이토는 제국주의 압제의 정점이었다. 그들이 마음 속으로 갈구하던 것을 대리로 속시원히 해결해준 저 전광석화의 용기. 그것이 하얼빈의거다. 하얼빈의거의 하일라이트는 두개의 점, 즉 안중근 포인트와 이토 포인트 사이의 5m를 날아간 총알 3발이었다. 하얼빈역은 그것이 일어난 공간이었고, 아침 9시30분은 그것의 시간이었다.
기념관은, 안중근 포인트를 삼각형으로 그려놓았고, 이토 포인트를 사각형으로 그려놓았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기념관에 재현된 도형이미지를 분석해보면) '안중근 삼각형'의 특징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삼각형은 저격의 방향을 가리키는 꼭지점을 지닌 도형이다. ▶ 삼각형 속에 있는 7개의 다이아몬드별은, 등에 7개의 점을 지니고 태어난 안응칠(應七,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답하여 탄생한 사람, 안중근의 어린 시절 이름)을 상징하면서 일곱 발의 총성을 의미한다. ▶ 삼각형의 바탕이 흰 것은 조선족의 백의(白衣)를 연상시키며, 안의사가 사형 때 입었던 수의의 빛깔이기도 하다. ▶ 적색은 총알의 섬광과 타겟의 피를 암시하는 듯 하다.
'이토 사각형' 또한 의미심장하다. ▶ 사각형과 원형의 전체적인 구도는 과녁의 이미지다. 즉 총알이 날아간 표적을 뜻한다. ▶ 사각형은 당시 세력구도인 한-중-러-일이 공존 각축하던 세계를 압축한 도형이기도 하다. ▶ 3개의 동심원은 타겟(이토)에 명중한 3발을 상징한다. 동심원으로 표현된 까닭은, 일제의 충격파를 이미지화한 것일 수 있다. ▶ 사각형의 전체 빛깔은 적색은 삼각형의 7개의 별 속에 들어있던 피가 전체로 번진 형상이다. ▶ 전체 사각형과 중간의 흰색 원형은, 일장기를 반전한 이미지를 연상케 해, 쑨원이 읊은 縱然易地亦藤候(종연역지역등후, 재상과 죄인의 자리 바꾸는 건 이토도 별 수 없구나)의 역전극을 연상시킨다.
아마도 중국의 안중근기념관 측은 여러 전시물 중에서, 이 '투 포인츠'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는데 가장 공을 들인 듯 했다. 그날 아침 이발소에 들러 일본인처럼 머리를 다듬고 말끔하게 위장하여 총을 품고는 두려움 없이 5m 앞까지 전진한 사람의 자리와 총성 10여초만에 맥없이 무너진 제국주의 최상 권력자의 자리. 긴박한 대치를 리플레이하는 두개의 점. 이보다 더 실감나는 연상장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안중근은 이 거사의 장소로 오기 전 무슨 생각을 했을까. 1909년 10월24일께 동지 우덕순에게 건넨 '장부가(丈夫歌)는 그의 심경을 웅변한다.
雄視天下兮 何日成業(웅시천하혜 하일성업)
세상을 노려보노니 언제 의거를 이룰 것인가
東風漸寒兮 壯士義烈 (동풍점한혜 장사의열)
동쪽바람이 점점 차구나 전사의 의기는 맵도다
憤慨一去兮 必成目的 (분개일거혜 필성목적)
비분강개로 달려가노니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
鼠竊○○兮 豈肯比命 (서절이토혜 기긍차명)
쥐같은 도둑 00(이토)여 어찌 그 목숨을 낙관할 수 있으리
이토는 이 죽음의 장소로 오기 전 무슨 생각을 했을까. 1909년 10월 14일 일본을 떠나면서 기차에서 남긴 시 한편이 남아있다.
秋晩辭家上遠程, 車窓談盡聽蟲聲(추만사가상원정 차창담진청충성)
明朝渤海波千尺, 欲悼忠魂是此行(명조발해파천척 욕도충혼시차행)
늦가을 집을 떠나 먼길 오르네, 차창의 이야기 다하니 벌레소리가 들리는구나
내일 아침엔 발해만의 파도가 천 척이리, 충혼을 애도하고 싶구나 이 여행길에서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듯 발해만의 파도와 충혼의 애도를 담았다.
이 기념관이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까닭은, 항일의 기세 드높았던 동북3성과 하얼빈 전체를 기념관으로 활용했고 하얼빈역을 소품으로 썼으며 여전히 살아숨쉬는 역사를 배경으로 깔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보고온 것은 안중근만이 아니라, 그에 대한 불멸의 추앙과 영원의 파문이었다.
안중근은 1910년 2월 뤼순감옥 독방에 앉아 중국을 향해 이런 시를 썼다.
오로봉위필(五老峯爲筆)
청천일장지(靑天一丈紙)
삼상작연지(三湘作硯池)
사아복중시(寫我腹中詩)
오로봉(중국 여산 부근의 다섯 봉우리 산)을 붓으로 삼아
푸른 하늘을 한 장의 종이로 삼아
삼상(중국의 양자강, 상가강, 원강 등 세 개의 강)을 벼루의 먹 삼아
내 뱃속의 시를 옮겨 쓰노라.
그 거대한 대륙의 기운을 지니고 뭘 하고 있느냐. 그 산과 하늘과 강을 내 필기구 삼아서 내가 이렇게 뱃속에 써놓은 한 편의 시를 써보이었나니, 그대들은 아는가. 기념관은 끝없는 기개 앞에 응답한 작은 환호성의 일부일 것이다.
# 중국이 왜 '이웃나라의 순국열사'를 위해 공들여 기념관을 만들었을까
언뜻 생각해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질 일이다. 1909년 10월26일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일본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擊殺)한 사건은, 중국으로서는 제3자 입장일 수 밖에 없다. 조선인이 일본인을 러시아 지역에서 죽였으니, 엄격히 말하면 남의 나라 일이다. 이 기념관은 역설적으로 여기에 핵심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한국적의 안중근은 의거 이후 당시 조선 뿐 아니라 중국-러시아-일본의 역사 물줄기를 바꾼 글로벌 변화의 촉진자였다.
특히 중국에서는 '안중근현상'이 두드러졌다. 다롄대학 동북사연구전문 최봉룡 박사(조선족 출신)는 11일 이렇게 말했다. "안의사 의거 전과 후는 시대가 바뀝니다. 세계 정치와 외교 흐름에서 이토는 20세기 리더의 표본이었으며 동양평화의 영웅으로 추앙을 받고 있던 사람이었죠. 그런데 안중근의 총을 맞은 뒤 영웅과 흉한(凶漢)이 전도되는 역설이 일어납니다. 세계는 시각을 다시 조정하기 시작했죠. "
최박사는 이런 단언까지 한다. "안중근 영웅현상은 중국인의 손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시 중국은 반청(反淸, 청나라에 반기를 듬) 의식이 숙성되면서 민족주의에 눈을 뜨죠. 항일 정서도 고조되는 상황이었지만 일제의 기세에 억눌려 있었죠. 그런데, 조선의 안중근이 일제 최고의 거물을 저격한 겁니다. 사실 그때 조선 내부에서는 안의사에 열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바깥이 더 뜨거웠고, 특히 중국인들이 안중근에게서 제대로 자극을 받은 겁니다." 해방 이전 중국인이 저술한 안중근 전기도 잇따랐다. 정원의 '안중근'(1920), 공소근의 ‘망국혼전기(亡國魂殿記)(1911), 매현 섭천예의 '안중근전' 은 그를 조명하며 역사를 바꾼 세계적 위인으로 기록한다.
"1911년 청나라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으로 세운 국가인 중화민국. 그 혁명전야에 한줄기 봉화같은 안중근현상이 있었습니다." 최박사의 언급은 인상적이었다. 혁명 이후 대총통에 오른 쑨원(孫文)의 '안중근 예찬시'는 그걸 뒷받침한다.
功蓋三韓名萬國(공개삼한명만국)
生無百歲死千秋(생무백세사천추)
弱國罪人强國相(약국죄인강국상)
縱然易地亦藤候(종연역지역등후).
"공로는 한반도를 덮고 이름은 세계에 떨쳤도다.
살아선 100세를 못살지만 죽어서 천년을 얻었구나.
약한 나라 죄인과 강한 나라 재상.
마침내 서로 자리 바꾸는 일은 이토도 별 수 없구나."
영웅과 흉한의 역전극을 시 속에 표현해 놓았다. 중국에는 1950년대까지 학교 교과서에서 '안중근'을 배웠다. 이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자국의 영웅처럼 기억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중국에게 안중근은 '남의 나라' 사람이 아니라 진짜 자국민이라는 인식이 있다는 것이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은 9일 하얼빈역 안중근 기념관과 관련해 중국의 '근현대사 동북공정'의 일환일 가능성을 비쳤다. 하얼빈을 비롯한 동북3성 지역에는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중국은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이 참여한 항일독립운동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켜놓고 있는 상황이다. 안중근은 한일합병 이전에 순국한 사람으로 조선족으로 분류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의거 기념사업은 조선족 역사를 확장하는 개념으로 일종의 '동북공정'으로 읽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기념관에 대한 중국의 태도는 생각보다 조심스러운듯 하다. 이 기념관이 예민한 또하나의 당사국이자 이웃국가인 일본과 갈등의 불씨가 될까봐 우려하는 기색이다. 기념관 재개장을 발표하는 일에 신중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까. 이 기념관이 일본에겐 지워도 지워도 되살아나는 '무서운 역사의 진실'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취재지원 = 한국기자협회·한국언론진흥재단>
헤이룽장성 하얼빈=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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