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 갈등에 이어 ‘기술패권’경쟁을 둘러싼 양국의 진영 전열이 정비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외교에 또 다른 암운이 드리워지고 있다. 이에 대통령은 연일되는 미·중 양국의 공식적이고 노골적인 압박에 ‘기업이 알아서 대응하라’는 말만 남기고 홀연히 유럽순방 길에 올랐다. 외교부는 이른바 ‘전략조정지원반’을 외교부,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7명의 직원으로 구성한다고 발표했다. 군사안보전략부처의 인사가 빠져 급조한 인상을 남겼다. 우리 정부의 처사는 ‘기술패권’ 경쟁으로 신냉전의 구도가 잡혀가는 기로에서 ‘백기투항’하는 모양새라 안타깝다. 기술안보문제는 단순히 기업의 문제가 아닌 우리나라의 국가안보이익과 전략의 판도를 바꿀 현안이다.
우리 정부의 무책임하게 회피하는 대응 자세는 현재 미·중관계를 심각하게 오독한 데서 기인한다. 미·중 무역협상이 타결되면 ‘고디언의 매듭’이 풀리듯 북핵, 대만과 화웨이 문제의 연쇄적인 해결을 기대하는 듯하다. 현실은 정반대다. 이 모든 일련의 문제가 연관성이 없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무역협상에 화웨이 사태는 의제가 아니다. 무역 갈등으로 북한 비핵화를 위한 공조에서 중국의 반발은 없다. 대만문제는 미국의 철저한 안보전략 계산에서 기인했다. 그래서 미·중 통상갈등의 해결이 본질적으로 다른 갈등요소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미국에게 대만, 북핵과 화웨이 문제는 군사안보전략이익의 문제다. 지난 1일 발간된 미 국방부의 ‘인도-태평양전략’ 보고서에서 대만을 다른 나라와 함께 ‘국가’로 분류한 저의를 명확히 이해해야한다. 대만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철저한 비즈니스 마인드에서 출발했다. 이는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냉정한 이해타산적인 셈법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취임 직후부터 무기 세일즈 외교를 통해 미국 경제 부흥에 보탬이 되기 위한 전술을 적극 개진했다.
취임 첫해인 2017년부터 동아시아 순방에서 그의 계획은 철저하게 이행되었다. 2017년 그는 대북 선제공격을 네 차례 공언하면서 한반도 주변국가의 불안 심리를 자극시켰다. 우리에게는 북한의 핵위협, 일본에게는 북핵과 중국의 부상, 그리고 베트남, 필리핀, 태국 등의 동남아 국가에게는 중국과의 영토분쟁에 대한 심리적 불안감을 조장하면서 무기 세일즈의 행보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그해 7월 미국에서의 첫 한·미정상회담을 필두로 매번 정상회담에서 우리의 미국 무기 구매가 계속 이뤄졌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었다.
트럼프는 중국의 군사적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대만도 거대한 잠재적 군수시장으로 본 것이다. 이런 시장의 개척을 위한 포석은 당선 직후 시작됐다. 대만 총통의 전화 통화를 수용하는 계략을 실천했다. 2018년 3월에 ‘대만여행법’에 서명함으로써 대만과의 군사교류 증강의 초석을 마련했다. 대만 고위층과의 교류와 방문을 허용하는 법안은 첨단무기판매의 전제조건이었다. 군 당국의 고위급 인사 교류와 방문의 제약은 판매한 무기의 교육과 훈련 활동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대만여행법’의 효능이 올해부터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지난 5월 ‘단교’ 이래 대만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사무총장이 워싱턴을 방문해 존 볼턴 미 국가안보보좌관과 회담을 가졌다. 한 달도 안 돼 출간된 미 국방부의 ‘인도-태평양전략’ 보고서는 중국의 대만 무력 위협을 부각하면서 대만의 무기 구매를 정당화했다. 일각에서는 심지어 일본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일부를 대만에 이전해야 한다는 분석도 제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본래 5억 달러의 대만 무기 판매 규모가 20억 달러로 지난 6일에 결정되었다.
화웨이 사태는 일명 미국의 ‘세컨드리 보이콧’의 효력을 본보기 삼기 위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작년 12월 캐나다 밴쿠버를 방문하던 화웨이기업 회장의 딸이자 부회장인 멍완저우의 체포 이유는 화웨이가 미국의 대 이란 제재를 위반하고 이란과 자금 거래를 한 혐의다. 사태 초기에 그녀의 체포와 기술패권문제와 무관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후 미국에서는 화웨이의 사이버안보 절취 사안도 추가 적용을 위한 검토 작업이 시작됐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화웨이제품의 도감청 기능에 대한 미국의 의구심이 사실임을 증명하려한다.
북핵문제와 관련해서도 우리나라의 많은 전문가들은 중국의 협조와 협력이 전제되기 때문에 미·중 무역 갈등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오독하고 오판하는 양상을 보인다. 아니 어쩌면 중국의 기대치를 대변하고 있다. 중국은 북한 비핵화에서 미국과의 공조가 무역협상을 원만하게 타결할 수 있는 매개 중 하나가 되길 기대한다. 역으로 협상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 중국은 이를 북한 제재 완화 등과 같은 문제에서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근거로 활용한다. 북한의 제재 완화를 원하는 이들이 선호할 수 있는 분석의 프레임이다. 미국이 완전한 비핵화 이전에 제재 완화가 없다는 입장은 미·중 무역 갈등과 북한 비핵화 간의 상관성이 없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이 모든 사안들이 미·중 무역협상과 별개로 미국의 대중국 견제의 포석 속에서 진행되는 속성과 성질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전략적 포석은 한 가지 목표와 두 개의 전략을 내포한다. 목표는 남중국해지역에서 배척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기본 전략은 인도-태평양전략 속에 ‘동맹국’의 군사력 강화를 명분삼아 동맹 강화와 미국의 경제이익 등 일석이조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이의 수반 전략으로 대중국 견제의 명분을 ‘기술안보’에서 찾고 있다. 신냉전의 구도가 그래서 이념과 지정학적 이유가 아닌 ‘기술안보’로 편이 갈릴 것이다.
우리 정부는 경제통상안보이익의 중요성을 인지한 듯 국가안보실의 2차장에 통상전문가를 선임했다. 아마도 백악관의 국가경제위원회를 표방한 듯하다. 표면상으로 혜안의 한 수로 보이나 실질적으로 군사안보적 전략 사고 능력의 구비 여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기술안보문제에 있어 ‘백기투항’ 같은 자세가 나올 수 없다. 미국의 제도를 도입했지만 실질적인 운영 방식에 개념이 없다는 방증이다. 백악관에서 경제제재나 무역보복조치 검토 회의에서 군 당국과 안보 관련 참모들이 모두 참석한다. 우리도 국가안보이익의 수호 대책을 검토함에 있어 군과 안보 당국을 포함한 전면적이고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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