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빈 롯데 회장이 “한국인들에게 사랑받는 국민 기업으로 나아가겠다”며 지배구조 개선 계획을 발표한 지 4년 만에 또다시 그룹의 국적 논란이 수면 위로 올랐다. 한·일 양국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된 상황에서 신 회장이 일본으로 출국한 배경 때문이다.
10일 롯데그룹에 따르면, 신 회장은 지난 5일부터 일본에 머물며 현지 금융권 등 재계 관계자를 두루 만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일본에서 나고 자란 신 회장이 이번 출장을 통해 경색된 한일 관계에 물꼬를 트는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됐지만, 그저 시기가 맞물렸을 뿐이다. 신 회장은 해마다 일본 롯데홀딩스 정기 주주총회 이후 연례 행사처럼 현지 사업 점검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했었다.
신 회장은 지난 6월 25일 일본 롯데홀딩스 주총을 마치고 잠시 귀국한 뒤 열흘 만에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이로 인해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한 30대 그룹 총수 간담회에도 황각규 부회장이 대신 참석했다.
앞서 신 회장은 2015년 8월 경영권 분쟁에 따른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호텔롯데’를 상장하고 이를 다시 지주사와 합병해 ‘원(ONE) 롯데’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되면서 호텔롯데의 상장 시기는 기약 없이 미뤄진 상태다.
동시에 신 회장의 입지도 바람 잘 날 없었다. 국정농단 연루 혐의 등으로 구속된 지 8개월 만인 지난해 10월에서야 겨우 경영에 복귀했다. 대표이사직을 내려놨던 일본 롯데홀딩스도 지난 6월 주총에서 다시 대표로 재선임되면서 입지를 다지게 됐다.
이를 기점으로 재계는 신 회장이 호텔롯데 상장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다. 현재 호텔롯데는 일본 롯데홀딩스가 지분 90%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호텔롯데를 상장시키려면, 롯데홀딩스 주주들의 지지가 있어야 순조롭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롯데의 한국 롯데에 대한 영향력을 낮추기 위해 신 회장으로선 일본 롯데의 실적을 끌어올리고 현지 주주들의 표심을 사로잡아야 한다.
실제로 이번 롯데홀딩스 주총에서 주주들이 신 회장을 재신임한 데는 일본의 제과 부문 성장이 주효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신 회장이 2015년 롯데홀딩스를 이끌기 시작한 이후 제과 부문 연간 평균 성장률은 108%로 순항했다. 이에 일본 롯데의 제과 부문도 지난해 4월 상장 작업을 공식화했다. 아이스크림과 과자 등을 생산하는 롯데와 과자를 판매하는 롯데상사, 아이스크림을 판매하는 롯데아이스 등 3개 회사를 합병해 규모를 키웠다.
신 회장은 한국에서 호텔롯데 상장 후, 지주사와 합병해 일본 롯데홀딩스의 국내 영향력을 약화한다는 복안이다. 이를 통해 국내에서 롯데는 일본기업이란 인식을 희석시킬 수 있다. 형인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경영권을 주장할 마지막 명분도 없어진다. 신 전 부회장은 현재 일본 롯데홀딩스 최대주주인 광윤사의 대표이자 주주다.
신 회장은 이번 일본 출장에서 기반을 다진 뒤, 오는 16일부터 5일간 열리는 롯데 전 계열사 사장단 회의인 VCM(Value Creation Meeting, 옛 사장단 회의) 직전에 귀국할 예정이다. VCM에는 롯데 전 계열사 대표와 지주사 임원 등 1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16일은 식품, 17일 유통, 18일 화학, 19일 호텔 등 롯데그룹 내 4개 사업부문(BU)별로 VCM을 진행한 뒤, 마지막 날인 20일에 우수 실천사례를 모아 신 회장에게 보고할 예정이다. 롯데는 그동안 VCM을 매년 상·하반기 한 차례씩 개최했는데, 5일 동안 사장단 회의를 진행하는 것은 올 하반기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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