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이 겨우 1년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재선을 노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궁지에 몰리고 있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러시아를 선거에 끌어들였다는 의혹으로 집권 이후 곤욕을 치렀던 트럼프. 6개월 전 로버트 뮬러 특검의 조사가 결론을 유보한 채 종료되자 트럼프 대통령은 소위 '러시아 스캔들'에서 면죄부를 얻은 것처럼 득의양양한 모습이었다. 당시 민주당 수장인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트럼프의 탄핵열차를 가로막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뮬러 특검의 활동을 방해한 의혹만 가지고 탄핵 절차를 시작하는 것은 오히려 민주당이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스캔들'에 이어 소위 '우크라이나 스캔들'이 터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멈춰 섰던 탄핵열차가 출발하면서 미 대선정국은 이젠 탄핵정국으로 급변했다. 우크라이나 스캔들은 지난 7월 트럼프가 볼로디모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군사 원조를 빌미로 정적(政敵)인 조 바이든 부자의 부패 혐의 수사를 압박했다는 의혹을 일컫는다. 미국 및 세계 주요 언론의 헤드라인은 매일 트럼프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의 국정 지지율은 새로운 스캔들로 미국 정가가 떠들썩해도 별반 영향이 없다. 일부 여론조사 결과는 올해 들어 가장 높은 수준의 지지율을 보여주고 있다. 왜 그럴까?
우선 무엇보다도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들이 왜 공화당 후보로 나섰지만 '정치적 이단아'로 취급받던 트럼프를 선택했는지 이유를 알면 이해하기 쉽다. 간단히 말해서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은 그가 워싱턴의 정치 질서를 마구 흔들어 놓기를 바랐다. 이러한 이유로 트럼프의 괴팍한 성격 그리고 기성 정치의 틀과 법률을 무시하는 듯한 행동 등에 대해 그의 지지층은 본능적으로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고 있지 않다는 것이 지배적인 분석이다. 지난 선거 당시 트럼프는 '오물을 청소하겠다' (drain the swamp)'라는 슬로건으로 미 정치권의 적폐청산에 자신이 앞장설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트럼프가 자신의 재선을 위해 외국 국가원수에게 조 바이든 부자를 조사하라고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기보다는 과거 적폐청산 작업이라는 시각으로 이번 스캔들을 바라보는 듯하다. 지지층이 트럼프의 행동에 등을 돌리게 하려면 바이든이나 다른 유력 민주당 정치인들이 부패와 거리가 먼 무결점 정치인이라고 믿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과거 CNBC 프로듀서 출신 정치 분석가인 제이크 노박은 최근 칼럼에서 많은 미국인들은 정치인들을 신뢰하지 않고 있으며, 트럼프가 '쓰레기장을 마구 헤치고 다니는 개' (junkyard dog who digs it all out)의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해 일반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닉슨과 다른 점
우크라이나 스캔들은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을 탄핵 위기에 몰리게 하며 중도하차 시켰던 '워터게이트 스캔들'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트럼프가 닉슨과는 다른 결말을 맺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두 대통령은 정치적 또는 개인적 브랜딩 차원에서 너무도 다르다. TV 리얼리티 쇼 진행자이던 트럼프가 과장과 허풍을 늘어 놓아도 이상할 게 없지만, '법·질서'의 이미지로 대통령에 선출된 닉슨의 경우는 달랐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1972년 대선 당시 닉슨의 재선을 획책하는 비밀공작원이 워싱턴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를 침입하여 도청장치를 설치하다가 연방정부의 수사가 진행되자, 닉슨 대통령이 이를 방해하고 은폐하려던 사건이다. 당시 닉슨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불법을 무시했다는 폭로는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면서 그의 지지율이 폭락하자 마침내 1974년 8월 하원의 탄핵 표결이 개시되기 직전 사임했다. 사임 직전 그의 지지율은 22%에 불과했다. 그러나 트럼프에 대한 의회의 탄핵 조사가 본격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지지도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40%대 초반을 유지하며 큰 낙폭을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 언론은 트럼프의 경우 닉슨 전 대통령 사례보다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사례와 비슷한 모습의 사태 진전을 점치고 있다. 1988년 폴라 존스, 모니카 르윈스키 등 여러 건의 성추문 관련 위증과 사법방해 등의 사유로 클린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했던 하원에서 가결되었지만, 이듬해 상원에서 부결된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의 여성편력이 많은 미국인들에게 그리 놀라운 사건은 아니었고, 그를 지지하던 인사들이 대거 24시간 케이블뉴스방송에 출연, 그를 적극적으로 변호한 것도 힘이 컸다. 트럼프가 폭스뉴스 등 자신을 지지하는 보수 언론 매체뿐 아니라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비판세력을 공격하고 자신의 입장을 적극 알리는 상황도 닉슨 대통령 시절 미 정치 게임의 법칙과는 거리가 멀다.
트럼프의 운명을 예측하는 데 경제 상황도 무시할 수 없다. 닉슨이 탄핵 위기에 몰릴 당시 미국 경제는 유가 급등으로 인한 높은 인플레이션, 주가하락과 저성장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와 달리 현재 미국 경제는 미·중 무역전쟁에도 불구하고 실업률이 반세기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는 등 견조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클린턴 전 대통령도 탄핵 위기 시 경제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민주당의 탄핵조사 개시 선언 뒤 트럼프 캠프에 후원금이 대거 몰리고 있다. 공화당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막강한 장악력도 현재까지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 트럼프 탄핵이 성공하려면 민주당이 다수인 하원 표결을 거쳐 공화당이 다수인 상원 3분의 2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즉, 공화당 상원의원 53명 중 20명의 '반란표'가 필요하다. 그러나 탄핵 사태 트럼프와 명운을 같이하는 공화당원의 대거 이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이런 상황에서 승산이 없는 탄핵 싸움을 택한 민주당의 선택 이유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일단 탄핵이 '부결'되어도 별로 잃을 게 없다고 여길 수 있다. 탄핵 정국을 주도하면서 트럼프의 부도덕함과 위법성을 최대한 부각시켜 내년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현재 트럼프의 굳건한 지지층은 흔들리지 않지만 그의 탄핵에 동조하는 여론은 상승하고 있다. 탄핵 정국 전만 해도 재선 가도에 자신감을 보이던 트럼프 진영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당의 탄핵 추진 결정이 내년 선거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전 세계의 관심은 커지고 있다.
트럼프의 대북외교 청구서도 '만기'
탄핵안 통과 여부와 관계없이, 우크라이나 스캔들은 그 자체만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 추진에도 부정적인 영향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스캔들과 관련, 제2의 내부고발이 접수되고 이에 대해 정보기관의 반발도 커지면서 트럼프 행정부가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대외협상을 추진하기는 점점 더 어려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미 하원은 트럼프 대통령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통화를 직접 청취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에 대한 탄핵 조사도 추진 중이다.
이왕휘 아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이는 북한과의 핵협상에도 악영향이 불가피한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대북 강경노선을 대표하는 존 볼튼 국가안보보좌관이 해임된 후 낙관론이 부상했지만, 지난 5일 스웨덴에서 열린 북·미 협상의 실패는 이미 예고된 것으로 평가했다. 이 교수는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인해 국무부와 정보기관의 고위관리들이 의회의 소환 조사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것은 고사하고 실무협상에 대한 준비도 어려웠을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은 물론 폼페이오 장관도 탄핵안에 대한 대응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고위급 회담을 통한 일괄 타결 가능성도 점점 더 희박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미국과의 합의가 탄핵 또는 내년 대선 결과에 따라 곧바로 허물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비핵화 합의를 서두를 이유가 없는 것이다.
美 시사지 애틀랜틱은 8일 탄핵 국면에 돌입하면서 대통령 개인이 좌지우지해온 트럼프식 대북 외교의 청구서는 '만기'가 됐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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