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보다 부자 국가였다. 국토는 한반도 면적의 12배가 넘는다. 이 중 60%는 '팜파스'로 불리는 비옥한 대평원이다. 유럽 이민자들이 이곳으로 대거 몰려와 근대 농업을 수출 산업으로 발전시켜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했다. 우리나라와 지구 정반대에 위치한 아르헨티나는 오늘날 '경제 위기'라는 꼬리표를 항상 달고 있다. 선진국 대열에서 탈락한 국가로 제일 먼저 거론되기도 한다. 지난 60년간 거의 30차례나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나라가 겪은 경제적 혼란이 얼마나 심각한 모습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워싱턴에 본부를 둔 국제금융협회(IIF) 추산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의 인플레이션은 1980년 이래 매년 평균 무려 220%를 기록했다. 역대 61명의 중앙은행장 중 임기를 채운 사람은 1940년대 단 1명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아르헨티나를 '분수 넘치게 살고 있는 나라' (a country living beyond its means)'로 표현했다. 조세나 다른 방법으로 정부가 벌어들이는 수입에 비해 지출이 지나치다는 것이다. 이는 아르헨티나가 걸핏하면 금융과 외환위기에 빠져드는 근본 원인이다. 2000년대 초 중국의 수요 급증으로 국제 곡물 가격이 반짝 급등할 때만 제외하고 아르헨티나는 1950년 이래 거의 매년 막대한 규모의 재정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4년 전인 2015년 선심성 복지정책을 위해 정부 곳간을 탈탈 비운 좌파 포퓰리즘 정권이 12년의 통치에서 물러나고 신시장주의를 내세운 보수 우파 마우리시오 마크리 정부가 출범했지만, 재정적자 규모는 전체 GDP의 약 5%나 차지하고 있다. 적자를 메꾸기 위해 정부는 신규 통화를 발행하거나 외자를 빌릴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물가는 가파르게 오르지 않을 수 없는 구조이다. 이 나라가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는 국내 산업 보호와 배타적 무역 정책의 뿌리는 너무도 깊이 박혀있고 기업의 경쟁력도 형편이 없다. 이로 인해 수출을 통해 달러화 채무를 상환하기는 너무도 버겁기만 하다. 해외 금융기관들은 이렇게 리스크가 큰 나라에 저금리로 자금을 빌려줄 리가 없다. 고금리로 인해 부채 상환은 더욱 힘들어지고, 외환 지급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경제는 수렁으로 더욱 깊이 빠져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기업가 출신 마크리 대통령은 정부의 과도한 지출을 줄이고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면서 디폴트 국가경제프레임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국제 금리의 상승 여파로 아르헨티나 부채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가 확대되면서 좌절에 빠졌다. 지난해 페소화의 가치가 반토막이 되고 공공요금 상승과 소비자들의 구매력 감소로 인해 경제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급기야 작년에는 IMF로부터 563억 달러 규모의 자금 지원을 승인 받았다. 인플레이션을 고려하지 않은 기준으로 보면 사상 최대 규모의 구제금융이다. 이를 받는 조건으로 아르헨티나 정부는 연금 축소와 공공부처 50% 축소 등 비상 긴축 정책에 들어갔지만 국민들은 정부에 등을 돌리고 있다. 지난 8월 마크리 정부는 1010억 달러의 외채에 대해 IMF 등 채권단에 상환 연기를 요청한 상태이다. IMF는 개혁 프로그램이 지지부진한 아르헨티나에 지원을 계속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져있다.
가치가 연속 추락하는 아르헨티나의 페소화는 일상적으로 기초적 상품거래에만 사용된다. 은행 예금은 대부분 달러화 계좌로 이루어지고, 은행 앞에는 달러 예금을 현금으로 바꿔 금고 속에 보관하려는 고객들로 줄이 길게 서있는 것이 현실이다. 2001년 아르헨티나 금융위기 당시 정부가 강제로 달러화 예금을 국채나 페소화 예금으로 전환시킨 기억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현재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매트리스 밑에나 금고에 숨겨놓은 달러화의 규모가 적게는 700억 달러에서 최대 1500억 달러로 추산하고 있다. 2000년 12월 아르헨티나는 IMF로부터 397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요청한 뒤 국가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선언했다. 이듬해인 2001년 경제는 11%나 하락하고 당시 페르난도 데 라 루이(Fernando de la Rua) 대통령은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피해 헬기를 타고 대통령궁 지붕에서 탈출해야만 했다. 중도 성향의 페르난도 대통령은 직전 좌파 포퓰리즘 정권과 달리 재정적자 감축을 위해 강력한 긴축 정책을 펼쳤지만, 국민의 반발에 부딪혀 2년 만에 사퇴한 것이다. 현재의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는 2001년 경제붕괴 당시보다는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장기간 침체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아르헨티나의 올해 2분기 GDP는 전분기 대비 0.3% 하락했지만 전년 동기 대비로는 0.6% 상승했다. 2분기 실업률은 10.6%로 1분기 10.1% 대비 소폭 상승했다. 지난 1년간 물가 상승률은 5월 기준 57%에 달했다. 수치적으로 보면 과거에 비해 경제회복에 대한 잠재력이 엿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도 아르헨티나가 포풀리즘의 마약에 중독된 상태로 있다는 것이다.
'성녀' 에바 페론, 포풀리즘 태풍의 진원지
'축구의 신' 마라도나와 메시가 우선 떠오르는 나라. 또 열정 넘치는 탱고의 나라이기도 한 아르헨티나는 70여 년 전 좌파 포퓰리즘의 거대한 태풍이 몰려왔던 나라로도 잘 알려져 있다. "Don't cry for me Argentina.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나는 그대를 떠나지 않아요) 란 가사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노래는 1978년 초연된 브로드웨이 뮤지컬 '에비타'에서 여주인공이 부르는 노래이다. 에비타는 바로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였던 에바 페론이다. 그녀는 팜파스 농장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온갖 역경을 다 겪은 후 군부 실력자인 육군 대령 후안 도밍고 페론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1946년 페론이 대통령이 되자 에바는 정치 전면에 나서 노동자의 임금, 복지와 여성,아동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대규모 복지사업과 봉사활동에 나서면서 국민들로부터 '성녀'로 불리었다. 그러나 당시 페론 정권이 내세운 외국 자본 배제, 산업 국유화, 복지 확대와 임금 인상 등 '반시장적' 대규모 무상복지 정책은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한 것이었고 실질적으로 나라의 재정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결국 이러한 정책들은 생산성과 기업 경쟁력 저하와 고질적인 물가 상승 등으로 이어지며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하향곡선을 긋기 시작했다. 소위 '페론주의'는 오늘날의 아르헨티나를 만든 근본적 원인이라는 비판의 중심에 서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많은 대중은 1952년 34세의 나이로 척수 백혈병과 자궁암에 걸려 세상을 떠난 에바 페론을 그리워하고 그녀를 성녀로 추앙하고 있다.
페론주의 정권 4년 만에 복귀 확실
아르헨티나는 오는 27일 대선을 앞두고 있다. 군소 후보를 거르기 위해 8월 실시된 1차 투표에서 페론주의를 표방하는 좌파연합의 알베르토 페르난데스(Alberto Fernández)가 47.7%를 득표해 마크리 현 대통령에 15% 이상의 격차를 보였다. 이번 예비 선거 결과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마크리 정부의 긴축 정책에 대해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이리하여 전 세계 언론은 4년 만에 좌파 포퓰리즘 정권의 부활을 점치고 있다. 지난 4년간 경제 실정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감으로 마크리 대통령의 재집권에 대한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전망이다. 페르난데스 후보는 집권하면 IMF와 구제금융 조건을 다시 협상하고 마크리 대통령의 시장 개혁과 긴축 정책에 메스를 들 것이라고 벼르고 있다. 임금과 연금도 올릴 것이라는 공약을 내세우고 있다. 페르난데스의 러닝메이트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Christina Fernandez de Kirchner)는 마크리에게 정권을 내준 전임 대통령이다. 크리스티나 전 대통령은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재임 시절 공무원 증원, 연금 확대와 공공지출을 대폭 늘리고 기업들을 국유화하는 정책을 시행한 바 있다. 외신은 페론당이 집권하면 크리스티나가 실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녀는 네스토르 키스치네르 (Nestor Kirchner) 전 대통령(2003~2007년 집권)의 부인이다. 페로니스트 대통령이 집권한 2003년과 2015년 사이 공무원은 60%가 늘어났다. 현재 아르헨티나의 공공부문 종사자는 전체 노동인구의 26%나 된다. 4명 중 1명 꼴이다. 아르헨티나의 근대 역사는 멈추지 않는 포퓰리즘의 악순환이라고 할 수 있다.
4년 전 포퓰리즘에서 나라를 해방시키겠다는 슬로건으로 당선된 마크리 후보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 만큼, 선거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외국인 투자가들과 국제금융시장의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에 대한 국제 신뢰도는 급진적인 페론주의 정책과 반비례 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페르난데스 후보가 당선이 된다면, 그의 정부는 IMF 구제금융에 대해 아르헨티나의 역대 9번째가 될 디폴트 선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2001년과 같은 아르헨티나 외환위기가 재연되고 터키, 베네수엘라, 파키스탄, 레바논 등 다른 신흥시장으로부터의 급속한 자금이탈 현상도 우려해야할 상황이 온다. 미·중 무역 전쟁,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미·이란의 갈등에 이어 아르헨티나 문제가 세계 경제의 또 다른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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