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 때도 일본 융성을 말한 우치무라
우치무라 간조는 70세인 1930년에 눈을 감으며 "인류의 행복과 일본국의 융성과 우주의 완성을 기원한다"는 말을 남겼다. 예수와 일본을 늘 함께 생각했던 애국적인 신념을 드러낸 유언이었다. 그가 일본을 비판할 때도, 거기엔 깊은 애국심이 바탕으로 깔려 있었다.
그가 남긴 사상인 '무교회주의'는 평생 투쟁적으로 살았던 신앙적 삶의 기반 같은 것이었다. 또한 세상에 남겨놓은 결실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무교회주의는 나의 신앙이다. 혹자가 감리교회 신자이고 혹자는 침례교회 신자이고 혹은 성공회 신자이고 회중교회 신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무교회 신자이다."
류영모는 톨스토이의 신학적 입장과 마찬가지로 '교회' 자체가 성서에는 없는 기업적 시스템이며, 예수의 초인적 면모나 '기적' 또한 믿음을 돋우고자 후세에 덧붙인 가필일 뿐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교회를 중심으로 교파를 형성하고 그 밖의 신앙행위를 이단으로 배격하는 서양기독교의 골격에서 스스로 이탈하고자 했다.
그는 정통을 표방하는 교회들을 비판함으로써 이런 생각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교회를 나와 성서 속의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가르침을 가려내고 동양적 통찰과 함께 적용하여 그 보편성을 실천하는 길을 걸었다.
우치무라 '무교회'는 서양식 기독교에 대한 반대
그러나 우치무라의 경우, 삿포로 농학교에서 놀라운 형제애를 체험했던 '7인형제의 작은 교회'의 함의를 신앙적 신념으로 발전시켰다. 교회와 목사 중심의 서양 기독교가 아니라, 교인들이 신앙적으로 평등하며 자발적인 형식으로 움직이는 '교회 아닌 교회'를 실천한 것이다. 일본 기독교에 서양 전통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뿌리 깊은 애국적 주체성의 발로이기도 했다.
그의 무교회는 교회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교회의 제도주의와 성례전주의를 거부한 것이다.
제도주의는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분하는 계급시스템이다. 믿음 안에서 신도들은 철저히 평등하다는 얘기다. 또 신앙을 형식에 가두거나 교파적 신조가 구원을 독점한다고 주장하는 교파주의 혹은 배타주의를 비판했다. 예수 이후에 생겨난 인위적인 형식과 구분들이 본질적인 신앙을 오히려 훼손하거나 왜곡한다고 본 것이다.
성례전주의는 세례와 성만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세례는 죄를 정화시키는 기적적 힘이 있는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신앙생활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성만찬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형제·자매로 거듭나는 신앙행위라고 해석했다.
우치무라는 말했다. "나에게 교회는 없지만 그리스도는 있다.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내게도 교회가 있고, 그리스도가 나의 교회다." 그는 새로운 '교회' 운동을 실천하기 위해 성서를 새롭게 읽을 것을 제안했고, 그것이 '성서연구회'다. 기존의 기독교계에서는 성서를 연구한다는 시도 자체가 불경이었다.
조선산 기독교를 주창한 김교신
김교신(1901~1945)은 기독교를 계속해서 새롭게 표현하는 영적인 것으로 이해한 우치무라의 주장들을 '진정한 복음'이라고 믿었다. 복음의 진리를 일본 역사현실 속에서 실천하려는 우치무라는 그에게 진정한 기독교적 예언자로 여겨졌다. 그는 1927년부터 조선성서연구회 5명과 함께 '성서조선'을 발행한다. 이 잡지는 1942년 일제에 의해 폐간된다. 그는 이 잡지에서 '조선산 기독교'를 주창한다.
일본은 그가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해 감옥으로 보냈다. 1944년 전염병에 걸린 조선노동자를 간호하다가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후 '조선 무교회'는 친구였던 함석헌에 의해 주도된다. 그러나 함석헌은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의 격랑 속에서 우치무라의 무교회를 벗어나 새로운 역사 현실 속으로 들어간다.
우치무라는 당시 조선에 대해 과감한 우호적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3·1운동의 일제 탄압과 관동대지진의 대학살에 대해선 침묵했다. 김교신이 조선의 독립문제에 대해 질문하자 "영국과 스코틀랜드 관계처럼 되면 좋지 않겠느냐"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그는 기독교적 평등관을 실천하고자 했지만, 일본에 대한 애착을 넘어선 보편적 투철함은 지니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우치무라는 조선의 영적인 세계까지 노리는 영적 제국주의의 야심가"라는 맹렬한 국내 비판(김린서)까지 받기도 했다.
류영모는 비교적 우치무라에 대한 말을 아꼈지만, 자신과의 차이를 이렇게 말했다. "그는 외국 선교사에 반대하여 사도신경 정신에 입각해 교회 본래의 정통신앙을 세우고자 했죠. 나와 톨스토이는 (교회를 벗어난) 비정통신앙입니다."
나와 톨스토이는 우치무라와 다르다
이 뒤에 이어질 류영모의 말을 대신해준 건 에드윈 헤치('허버트강연집')였다. "예수의 산상수훈과 사도신경 사이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예수의 가르침은 불과 100년 사이에 다른 종교가 됐다. 정치화하고 세속화했다. "
레프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산상수훈인가 사도신경인가?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후자를 택했다. 사도신경은 교회에서 기도로 가르쳐지며 읽혀지지만 산상수훈은 심지어 교회에서 읽혀지는 복음 구절에서도 제외되고 그래서 전체 복음서가 읽혀지는 날을 제외하고는 교회의 집회에서 신도들은 결코 듣지 못한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말인지, 기독교도들조차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신앙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산상수훈과 사도신경이 이렇게 택일을 해야 하는 선택지인지, 그것이 지니는 논리적 갈등이나 모순이 무엇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감히, 왜 저런 질문을 던져 1800년 기독교 역사를 흔들고 있는 것일까.
예수의 참 메시지는 산상수훈
산상수훈은 성경 마태복음 5-7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산상수훈은 '성서 중의 성서'라고도 불리며, 예수가 선교활동 초기에 갈릴리의 작은 산(가버나움) 위에서 제자들과 군중에게 행한 설교다. 이 설교는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을 집약적으로 드러내고 있어서 기본적인 기독교 윤리지침으로 꼽힌다. 내용은 '8개의 복'과 사회적 의무와 자선행위, 기도, 금식, 이웃사랑에 대한 가르침이다. 참된 신앙생활의 내면적 본질이 무엇인지를 간명하게 말하고 있는 대목들이기도 하다.
심령이 가난한 이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임이요 /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요 / 순종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 옳음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배부를 것이요 / 연민을 지닌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연민을 받을 것이요 / 마음이 맑은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느님을 볼 것이요 / 평화롭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느님 아들이란 얘길 들을 것이요 /옳음을 위해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이다 <'산상수훈' 중에서>
'복이 있나니'의 앞에 있는 8가지 조건들은 역설에 가까운 것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된 삶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 '내가 잘되는 것'이 중심이다. 그러나 이 8복은 모두 남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으며, 공동체나 집단의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자기의 것을 덜어내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산상수훈은 8복을 말한 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고 한다. '세상'이라고 표현된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며, 소금과 빛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해야할 역할을 말한다. 소금의 역할은 세상의 부패를 막는 역할과 세상의 맛을 내는 역할이다. 빛의 역할은 어둠의 세상을 밝히는 역할과 모든 존재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역할이다. 현재의 역할과 미래의 역할을 겹친 비유로 말하고 있다. 소금이 그 맛을 잃거나 등불을 등경 위에 두지 않고 말 아래 두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면서, 예수는 소금답고 빛답게 사는 것이 기독교적인 삶이라고 말해준다.
사도신경, 신앙 '이단'의 판단 근거
한편 사도신경은 사도(apostle)가 전해준 신경(creed)으로 기독교 공동체가 공식적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과 규범을 가리킨다. 사도는 예수의 제자를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의 메시지 전달자들을 말한다. 2세기의 교회에서 정리된 세례의 믿음 고백 형식이 3세기 이래로 전하여 사도신경의 기본이 되었다. 4세기에 접어들면서 처음으로 사도신경이란 이름으로 불렸으며, 10세기에 완결된 형태로 서방종교에서 사용된다. 사도신경은 사도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전승에 기초해서 만들었으므로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사도신경은 이단을 판단하는 기초근거가 된다.
사도신경은 이런 형식을 지닌다. (1)나는 전능하신 하느님, 창조주를 믿습니다 (2)나는 그의 유일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며 장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다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3)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4)나는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와 교제와 죄를 사함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사도신경은 '내가 지금 여기서 믿는다'는 실존적 신앙을 강조하고 그 믿음이 전승되어온 것임을 강조한다. 이 강조는 이단과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단은 예수를 통해 계시해준 하느님이 아니라 개인적인 체험과 믿음 위에 세운 신앙이라는 논리다. 사도적 전승이 아니라는 점이 이단을 가르는 핵심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1800년 전 이교도들이 사는 고대 로마세계 한가운데 이상하고도 새로운 가르침이 나타났다. 이 가르침은 예수라는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옛 종교의 모든 규칙 대신 오직 내면적 완성과 진리, 그리고 그리스도의 화신인 사랑을 내세웠다. 이 가르침은 그 내면적 완성의 결과, 즉 예언자들이 예언한 외면적 완성인 신의 나라를 보여주었다. 이 가르침에는 진리, 교리와 진리의 일치 말고는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이 가르침에는 사람을 변호하여 정당화하고 그를 구원한다는 행위는 없었다." 즉, 예수의 가르침은 산상수훈의 내면적 완성과 사랑만이 본질이었다는 것이다.
사도신경에 나오는 실존적 신앙고백의 핵심에는 예수가 말한 '무욕과 사랑'은 전혀 없고 오직 인간과 다른 초인적인 기적에 대한 강력한 신뢰를 재확인하는 내용들만 담겨 있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생각이다. 이런 그의 생각은 '교회'라는 현재의 개념이 비성서적이며 비기독교적이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복음서에서는 교회라는 말이 딱 두 차례 나오는데, 단순한 모임을 가리킬 뿐 신앙의 기관이나 시스템을 가리키는 의미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가톨릭이나 그리스 정교회의 교리문답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톨스토이가 교회를 문제 삼는 더 큰 까닭은 스스로를 무오류로 주장하고 '이단'을 설정하는 개념으로 활용하여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에 대한 추구를 억압하고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가 자임했던 '사람과 신의 중재자'는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스스로 가르침을 인간 각자에게 알려주러 왔는데 왜 또 다른 중재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스도의 진실에 다가갈수록 교회가 세워놓은 교리들이 인위적이고 형식적인 허구임이 밝혀질 수밖에 없다. 교회에 대해 이렇게 놀랄 만한 발언을 쏟아낸 이가 대문호이자 종교사상가인 톨스토이였다. 이 땅에서 톨스토이의 이 같은 사상을 깊이있게 이해하고 그것을 한국에서 구체적이고 확장적으로 실천하고자 한 사람이 다석 류영모였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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