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이라는 한 글자의 함의
언젠가 외글자에 주목한 적이 있다. 어떤 언어체계에서 외글자(혹은 한 음절)로 이름이 붙은 것은 '원시의 네이밍'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인간이 처음 세상의 사물을 구분하기 시작하면서 이름을 붙였을 때 가장 먼저 붙인 것들은 대개 한 글자(한 음절)였다. 우주와 원시의 것들. 해, 달, 별, 물, 불, 흙, 땅, 꽃. 그리고 기초적인 관계. 나, 너, 그. 거기에 신체에 있는 것들. 눈, 코, 입, 귀, 배, 등, 손, 발, 팔.
이런 점에서 생각하면, 종교 수행자이며 비교적 뒤늦게 생겨났을 '중'이 한 글자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절도 그렇다.)중은 순 우리말일까. 왜 그 당사자들도 그렇게 불리기를 꺼려할 만큼, 낮춤말로 되어버렸을까.
전시대 정치가 낳은 '종교가치'의 처형
고려 때 수도 개경에 있던 절들은 왕들이 집무하는 궁궐로 쓰였다. 위대한 영웅(대웅)은 석가부처였다. 조선 유학자들의 집요한 억불(抑佛)이 '중'이라는 호칭까지도 조롱과 경멸의 대상으로 땅바닥에 패대기쳐 버렸던가. 중은 승려라는 한자어와 스님이라는 존칭으로 대체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중이라는 호칭의 죽음은 전시대 정치가 낳은 '가치'의 처형 집행이었기에, 그 시대에서 벗어난 지금까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중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짐작이 있으나 갈피를 잡기 어렵다. 대개 무리를 의미하는 중(衆)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고, 무엇을 하고있는 중이라는 ing의 의미인 중(中)에서 근거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다. 승(僧)이라는 한자어가 변했을 것이라고도 하고, 검이 신(神)을 가리키는 우리말인 것처럼, 그 자체가 어원일 수 있다고도 한다.
중이라는 말은 입술을 모으고 쭉 빼면서 입천장에 혀를 잠깐 붙였다 떼면서 '주' 발음을 낸 뒤 거기에 목구멍과 비강을 활용해 울림을 만들어 이응을 붙이는 발음구조를 지니고 있다. 기독교에서 절대자를 호칭하는 '주(主)'와 발음이 비슷한 것은, 그것이 경건한 느낌을 담는데 알맞은 점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응이 붙으면서 음악적인 울림을 지니게 되고, 종소리의 여운처럼 묵직해진다. 이 묵직한 음악성이 종교적 특징을 담은 것인지도 모른다.
대중의 분신이어야 한다는 의미
대중을 구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불교가 그 대중과 구도자나 메시지 전달자가 한몸이어야 한다는 사유에서 중(衆)이 되었다면, 이는 이 종교의 철학적 테제가 호칭에 이미 담겨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구원되어야할 존재와 구원해야할 존재가 한 호칭에 결합됨으로써 불교는 계급이나 권력일 수 없는, 대중의 분신들이 이끌어가는 종교여야 한다는 것을 천명한 셈이다.
가운데 중(中)자를 의미값으로 붙들고 있는 것이라면, 그가 향한 공부가 아직도 진행형이며 완전하지 않기에 분발이 필요함을 환기하는 호칭이라 할 만하다. 나는 아직 수행중이며 행공중이며 수도중이며 공양중이며 면려중인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다만 그 길에 서 있을 뿐,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는 의식은,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는 사유를 만들어낸다. 자연히 겸손할 수 밖에 없다. 나 또한 그곳을 향해 가는 사람이니, 세상의 무리들 속에 있는 것이며,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모든 존재는 해탈을 향해 정진하는 중이라는 슬로건을 담는다.
이 가운데 중(中)이 편벽되고 위태로운 데를 피한 요순의 윤집궐중(允執厥中, 오로지 그 중(中)을 잡으라)의 철학을 담는다면 더욱 의미가 풍부해진다. 일상 속에서의 중(中)을 실천하는 유교경전인 중용(中庸)의 철학이 거기에서 배태되었기 때문이다.
중이라는 호칭은 불교가 이 땅으로 침투하면서 대중과 호흡하려 한 흔적일지도 모른다. 기존의 신념들을 무너뜨리려 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그것들을 모두 포용하고 포섭하여 불교화된 양식으로 끌어안으면서 종교적 지반을 확장해온 전략이 그 호칭에 들어있을 수도 있다. 또 이 종교가 사실은 무엇인가를 기복하고 현실의 이익을 찾는 발복처나 위험을 피하려는 피난처가 아니라, 오직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찾아나선 겸허하고 일상적인 수행이라는 암시를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이란 말의 사멸은 '군림하는 종교'의 증거?
중이란 말이 죽어간 것은, 불교를 폄훼하고 그것에서 스스로의 명분을 찾으려는 적대적인 가치 사유에서 심심산골로 밀려난 까닭이 아니라, 종교가 스스로를 권력화하고 대중 위에 서서 군림하려는 사심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호칭의 번신(飜身)을 꾀한 흔적은 아닐까.
대중의 기복에 의지하여 종교 장사를 하기 시작하고, 또 대중의 어리석음 위에 걸터앉아 안락한 절집을 짓고 정치적인 권력이나 부자들과 눈을 맞추면서 종교수행과는 상관없는 특권을 키워왔기에 스스로 버려버린 호칭은 아닐까.
지금 대중과 빈틈없이 동일하다는 논리를 관철하거나, 다만 스스로는 아직도 많이 깨쳐야할 수행자일 뿐이라는 투철한 고백으로 낮은 바닥에 스스로 처하는, 그 '중'이 어디에 있는지, 불교와 그 대중은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서둘러 중을 죽이고 중님(僧님, 스님)으로 올라서면서, 이땅의 중들은 처음과는 다른 길로 접어든 기이한 존재가 된 것은 아닌가. 질문이 혹독하지만 이 반성을 생략한다면, 뼈를 깎는 수행이라 하기 이미 어렵지 않은가.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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