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는 ‘집을 많은 사람들의 삶 자체’로 이해한 현대 건축 이론의 선구자이자 미술가였다. 유럽여행 중에 만난 건축들을 스케치하면서 영감을 얻은 그는 건축설계를 배운다. 자신이 표현한 건축의 예술성과 지성, 그리고 창의성의 배경에는 매일 그린 그림이 있다고 회고하기도 한 코르뷔지에. 그에 깊이 매료되어 그림과 건축을 삶의 두 축으로 삼고 있는 건축가 화가가 한국에도 있다.
실경(實景) 수묵화가 김석환(金錫桓, 61. 터울건축 대표, 삼육대 겸임교수). 지난 10여 년 간 북한산을 꾸준히 그려온 그가 서울 종로구 인사동(인사아트센터 6층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에서 2월 3일(수)부터 새 작품들을 선보인다. ‘현장의 필치로 담은 북한산 실경수묵화전’이다. 그가 북한산 그림을 전시한 것은 이번이 일곱 번째다. 이번에 전시하는 작품들은 지난 1년간 북한산에 남긴 발자취의 결산이기도 하다.
건축가의 눈으로 본 산의 풍경은 어떻게 다를까. 건물이 인간의 생활과 꿈과 기억이 숨 쉬는 곳이듯, 자연 속에도 인간을 품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북한산을 쏘다니면서 직접 본 황홀하고 장엄하면서도 때론 쓸쓸하고 때론 애잔하기도 한 풍경들이 홀로 즐기기에는 아까웠다. 갤러리에 선 관람객이 마치 북한산 한 등성이에 서 있는 느낌을 갖도록 하고 싶었다. 산에서 만난 이 감흥과 꿈들이 다시 그의 건축에서 꿈틀거리며 살아날지도 모른다. 평론가 신항섭은 그의 북한산 그림을 “발로 쓰는 운문이자, 600여 년을 서울과 함께 한 역사적 실체로서의 산에 대한 헌사”라고 표현했다.
그의 수묵화는 수묵기법과 모필이란 도구를 쓰고 있지만 전통적 수묵산수화와는 좀 다르다. 독특하고 생생한 공간감이 느껴진다. 신항섭은 이런 느낌이 묘사 기법과 시각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화가가 발품을 팔아 산에 직접 올라 바로 그 현장에서 산의 웅장한 모습과 전체의 공기를 담아내기에 가능한 성취라는 얘기다. 김석환은 그동안 ‘등산 작업’이라는 점 때문에 이동성을 고려해 간편한 붓펜을 주로 이용해왔다. 그런데 지난 1년간의 그림은 모필을 썼다. “전체적으로 그림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그림에 좀 더 무게감을 더하고 싶었다”고 그는 말한다. 붓펜에 비해 굵은 선과 자유로운 농담표현으로 부드럽고 여유가 느껴진다.
이번 전시는 원래 2020년 고양 꽃박람회 기간에 전시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로 늦춰졌다. 지금도 여전히 전염병이 가시지 않아, 산에 가는 일도 쉽지 않은 시절이다. 전시에서 생생한 수묵화 속으로 들어가 북한산 등산을 추체험(追體驗)하는 것도 좋은 기회가 아닐까 한다. 거기에 건축가의 뷰와 미감이 담겨 있는 것은 원플러스원 같은 선물이다.
김석환은 특별히 그림 공부를 따로 한 적이 없다. 코르뷔지에에 매료되어 1991년 문득 그림 독학을 시작했다. 2005년 영풍문고 초대전 ‘한국전통건축드로잉전’ 이후로 단색 위주의 작업에 집중한다. 건강을 다지기 위해 북한산에 오르면서 평소 습관대로 스케치를 즐기던 것이 지금의 전시까지 이르렀다. 그는 이 작업을 꾸준히 계속해서 북한산의 전모(全貌)를 담는 게 꿈이다. 서울과 북한산은 어쩌면 그의 ‘터와 울’ 그 자체인지 모른다. 그의 전시는 답답한 집콕 시대의 후련한 등산과도 같다. 짓고 그리며, 코르뷔지에처럼 북한산의 생명력을 그림 속에 건축하고픈 한 예술가의 원형적 상상력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리뷰:이주영 논설실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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